성경으로 읽는 논어
성인의 말씀이라는 게 다 비슷비슷한 좋은 말들 모아놓은 거라는 얘기는 새로울 게 없다. 종교를 흔히 같은 정상을 향한 등산로로 비유하듯이, 근본에 이르면 대개 비슷하다. 물론 그럼에도 정상으로 이어진 길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어쨌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 성경 구절로 논어를 독해하며 쓸 글은 사실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뭐 전에도 그랬지만;;). 그러나 같은 내용이라도 남들 얘기 듣기만 하는 것과 내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직접 보자니 신기한 구석도 있고 해서 적어둔다.
내가 기독교를 깊이있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유교 사상에도 조예가 없으므로 밑에서 쓸 얘기들 중에는 잘못된 해석도 있을 것이고 억지로 끌어다 맞춘 듯한 느낌을 주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다. 조언이나 보충설명은 물론 대환영이다.
이하 인용은 김학주 역주,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및 한글 개역성경을 참조하였다.
<논어> 학이편 14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먹는 데 있어서 배부름만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사는 데 있어서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하며, 올바른 도를 지닌 이를 따라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학문을 좋아하는 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논어>가 좀더 자세히 풀어썼지만, 주제는 비슷하다고 본다. 눈 앞의 이익에만 매달리거나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추구해서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이겠다.
<논어> 위정편 4장
...일흔 살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
<마태복음> 18장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 '종심의 경지'를 이야기한 이 구절을 두고 공자가 '자뻑'이 얼마나 심했나를 여실히 드러내준다고 읽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선의를 갖고 해석해보겠다.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사람이 아닌 이상, 무엇이 법도인가 알려면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생동안 그런 판단을 계속하면서 자기 나름의 가치관과 세계관, 윤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자기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경이나, 욕심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이 세운 원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연약함을 끝내 극복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경지, 이런 경지를 공자는 종심의 경지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 될 때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게 예수가 말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논어> 이인편 10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천하에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으며, 의로움만을 좇는다."
<마태복음> 12장 2절, 7~8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중시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수백 수천 가지의 계율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그 계율에 얽매여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예수는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계율의 자구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상황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는 논어의 윗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논어> 공야장편 14장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누구의 제자라고, 무슨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논어는 전체를 통틀어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성경도 흔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들 얘기하지만 복음서를 보면 믿는 자는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논어> 옹야편 15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
<요한복음> 10장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양식)을 얻으리라.
* 올바른 도를 '문'에 비유하고 있는 점에서 두 구절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논어> 옹야편 19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급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상급의 것을 얘기할 수 있으나, 중급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상급의 것을 얘기할 수 없다."
<마태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논어> 자한편 21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싹이 자라나서도 이삭은 솟지 않는 것이 있고, 이삭은 솟아나서도 결실되지 않는 것도 있다."
<누가복음> 8장 5~8절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성경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비유이다. 말씀을 받고 실천하고자 하여도 주위의 여건과 개인의 자질에 따라 뜻을 이루는 사람도 있고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데, 좀 짧게 간추려지긴 했지만 논어에도 똑같은 비유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논어> 안연편 5장
"...군자가 공경히 행동하여 실수가 없고 남에게 공손하고 예를 지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형제인 것이오.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걱정하겠소?"
<마태복음> 12장 48~50절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이 두 구절은 사실 맥락은 정반대이다. 논어에서는 사마우라는 사람이 형제가 없음을 걱정하자 자하가 답한 말이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설교 중에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답한 말이다. 물음은 반대였으나 답변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논어> 안연편 21장
...자기의 악한 점은 공격하되 남의 악한 점은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한 생각을 다스리는 게 아니겠느냐?
<마태복음> 7장 3~5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논어> 안연편 23장
자공이 벗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고하여 잘 인도해 주되, 잘 안되면 그만두어 스스로 욕을 보지는 말아야 한다."
<디도서> 3장 10절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참고 : <마태복음> 18장 15~17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권고하라...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토론과 설득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는 부분같다. 한두 번 타일러 듣지 않는다면 이미 대화의 여지가 없다고 보아도 된다. 이 때 무리하게 설득하려 들거나 강권한다면 친구간의 의까지 상할 수 있다. 괜히 싸움이 일어나거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인 듯하다.
<논어> 자로편 24장
자공이 여쭈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고을 사람들 중의 선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들은 그를 미워하는 것만은 못하다."
<누가복음> 6장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일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억지로 모두의 칭찬을 얻으려고 노력하다가는 줏대없고 원칙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논어> 헌문편 30장
자공이 남을 비방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현명한 것인가? 나는 그럴 겨를이 없는데."
<마태복음> 7장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논어> 위령공편 23장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7장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논어> 위령공편 31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이 그 가운데 있지만, 공부를 하면 녹이 그 가운데 있게 된다. 군자는 도나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과거 양반들을 생각하면 흔히 집안 꼴이야 어찌 되든 아랑곳없이 책만 외고 있는, 무위도식하는 인간의 전형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위의 논어 구절을 좁게 해석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나의 생각으로 이 구절은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자신이 세운 원칙과 목표를 지키라는 뜻이다. 그렇게 살 때 다른 모든 것들 - 명예, 부, 권력과 같은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것들은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므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당장은 이득이 될지 몰라도 큰 일을 성취하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절은 성경과 정확히 만난다.
이밖에도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큰 주제를 본다면 둘은 꽤나 비슷한 것 같다. 세계관은 크게 다르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 결론은 좋은 사람이 되라는 건가. -_-;; 둘 다 좋은 구절들이 많아서 곁에 두고 읽으며 지침으로 삼을만할듯 싶다.
그러나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구원'과 '내세'라는 개념을 소거하고 나면 과연 어떤 차이점이 남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