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기장

승리하는 진보의 비결 - <정치가 우선한다>

술이부작 2013. 3. 12. 00:33

'정치가 경제에 우선한다.' - 사실 당연한 말이라 생각했다. 시장 원리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우파에 맞서 좌파들이 하는 주장이니 말이다. 좌파가 연구하는 학문도 경제학이 아닌 '정치'경제학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보고는 참 새삼스럽다 했다.

 

그런데 저자 셰리 버먼은 '정치가 우선한다'는 이 생각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중대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강조한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경제 발전 법칙에 따라 역사가 '필연적으로' 바뀐다고 했으니 말이다. 토대(경제)가 상부구조(정치)를 결정한다고 했던 것을! 나처럼 뭐가 원래 좌파의 주장인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는 게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을 입증해준다는 게 저자의 얘기다.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 시작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노선 투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부터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사회민주주의의 '내용'과 '승리의 비법'을 알고 싶었던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내용은 알차고 유익하다. 파시즘·나치즘과 사민주의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조금 충격도 받게 된다. 우리는 나치를 그냥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독재 체제로만 알고 있지만, 가령 이런 점을 보면 나치는 영락없는 사민당이다.

 

히틀러는 또한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고등교육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가족과 아동 부양에 대한 지원, 높은 수준의 연금, 건강보험 등을 누릴 수 있는 확대된 복지국가를 제공했다. 정부에 의해 추진돼 공적 지원을 받는 다양한 종류의 오락·여가 프로그램들 또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p. 220)

 

그래서 '히틀러의 정책은 전체 독일인 95%에게 혜택을 주었고, 그들은 나치를 온정적이면서 모호한 독재 체제로 경험'했다는 거다(p. 219). 이런 사실은 나치가 어떻게 집권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준다. 다만 '민주주의'를 전혀 중시하지 않았기에 파시즘과 나치즘은 사민주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그럼에도 이렇게 국가가 시장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복지 제도를 운영했던 경험은 2차 대전 뒤 사람들이 복지 국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하는 배경이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대목이었다.

 

어찌됐건, 좌파 진영 내부의 노선 투쟁따위는 관심 없고 사민주의의 승리 과정을 알고 싶다는 독자는 7장과 결론만 읽으면 될 듯하다.

 

사민주의는 어떻게 승리했는가? 정통 좌파는 무능했다. 집권 기회가 와도 '부르주아 체제에 참여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역사 발전 법칙만 믿고 아무런 정책 대안도 내놓지 않았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오히려 사회주의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며 방관했다. 이런 태도는 국민들에게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였고 결국 나치나 파시스트에게 나라를 내줬다.

 

스웨덴 사민당은 달랐다. 민주주의가 체제가 뒤쳐졌던 탓에 사민당은 처음 보통선거, 평등선거 등 민주주의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다. 우파들이 제기하던 색깔론 공세에 대항해 '국민의 가정'을 만들겠다는 수사를 쓰면서, 계급이 아니라 보편적인 국민의 이익을 강조했다. 사실은 우파가 쓰던 말을 자신들의 선거 모토로 바꾼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는 혁명이 아니더라도, 개혁 조치 하나 하나가 충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왕에게서 특권을 하나씩 없애 입헌 군주를 만들듯이, 자본가에게서도 특권을 하나씩 없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중적 호소 전략과 개혁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스웨덴 사민당을 전후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만들었고, 스웨덴은 강력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옮긴이는 한국의 좌파들이 제도권 정치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의회를 통한 개혁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정치를 통한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진보 정당을 통해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모순을 보였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좌파 운동가 그룹 일각에서 '개량주의'를 배격하는 어떤 기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의 실패가 옮긴이의 말처럼 근본주의-개량주의의 노선 투쟁 때문은 아닐 듯하다. 직접적 원인은 북한 인식을 둘러싸고 벌어진 NL-PD 논쟁과, 비슷한 전선에서 일어난 패권주의 논쟁 아닐까?

 

스웨덴 사민당의 성공에서 배울 게 있다면 점진적 개혁을 '개량'으로 무시하지 않은 태도가 아니라, 대중의 정서를 이해하고 대중의 언어로 국민에게 다가가는, 때로는 상대편의 언어를 빌려서까지 자신들이 만들려는 세상이 어떤 건지 쉽게 전달하는 능력일 것이다. 사민당 의원으로 재정부 장관을 지낸 비그포르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의 경제정책을 국민 대다수의 명백한 이익에 연계시켜 설명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이론적 설명 없이 일상적 상식에 부합하도록 경제에 대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 ... 경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에 호소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적수들이다." (p. 257)

 

지금까지 야권은 '반 새누리당'이라는 목표 외에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사안별로 오락가락하는 입장과, 전체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임기응변적 정책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 대안적 사회상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개혁 정책을 내놔야 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제기돼 온 비판이다. 비판 세력에서 대안 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수권 세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겨울만큼 들어온 얘기다. 결국 문제는 모두 알고 있다. 답을 내놓는 게 문제다. 기본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책이다.

 

더해서, 전후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체제를 모두 사민주의라고 하는 게 보편적인 분류법인지는 모르겠다. 북유럽과 서, 남유럽의 복지 제도와 수준엔 차이가 있고, 이걸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이 있다는 이유로 저자의 말대로 모두 사민주의라고 부르면 너무 넓은 개념이 아닐까 싶다. '수정 자본주의'='사민주의'가 돼버리는 것 같은데, 학계의 입장은 어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