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사에서 사라진 민주주의
#1.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취임함으로써 문민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참여, 대화, 타협을 핵심 단어로 꼽았다.
이런 경향이 사라진 건 이명박 전 대통령 때였다. 이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더 이상 민주주의를 '이뤄야 할 목표'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언급한 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강조할 때 뿐이었다. 민주화는 산업화와 함께 '이미 달성한 과제'였던 거다.
그게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는 시간이 지나고야 알 수 있었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 천여 명이 폭도로 몰려 처벌받았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퍼나른 사람은 사찰을 당했다. 비판적인 기자는 쫓겨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방송은 장악당했다. 세계적 모범 사례로 꼽혔던 국가인권위는 조직의 20%를 잃고 무력화됐다. 국회에선 법안 백여 건이 날치기 처리됐다. 대통령이 민의에 귀막고 언로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 측근들은 부패했고 비리에 앞장섰다. 대통령 자신부터 사저 매입 과정에서 국가를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리고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해 여론을 조작하려 했다는 의혹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2.
오늘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산업화와 함께 이룬 위대한 성취로 민주화를 한 번 언급할 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와 같다.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뭘까. 행여나 이 전 대통령처럼, 선거로 뽑혔으니 자신이 민의의 화신이라 생각하며 일방통행식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건 아닐까. 이제 겨우 첫 날이니 성급한 평가였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불안해 할 이유는 충분하다. 정파를 떠나 모든 언론이 비판했던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을 청와대로 데려간 걸 보라. 불통이 아니라 '원칙과 소신'이라 어쩔 수 없다고 친다면, 제발 시민의 자유만이라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른 취임사 내용에서도 우려가 적지 않다. 대북정책을 보자. "북한이 국제사회의 규범을 준수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진전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조건문이다. 결국 북한이 올바른 선택, 즉 핵 포기를 하지 않으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진전될 수 없다는 뜻이다. MB 정부와 다를 게 없어보인다. 남북관계는 당분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경제 부흥의 핵심 수단으로 강조한 창조경제도 공허하다. 과학기술을 전 산업에 어떻게 적용한다는 건지, 그건 이미 적용되고 있는 기술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다. "지구촌 곳곳의 우리 인재가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으니 김종훈 미래부 장관 내정자의 지명을 철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가장 의문스러웠던 건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는 슬로건이었다. 아버지 세대 '한강의 기적'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자는 거였다. 허리띠 졸라매고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일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박 대통령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며 정부를 믿고 힘을 합쳐달라고 호소한다. 지금 우리의 희망은 뭘까? 경제적으로는 이미 OECD에 가입한 중견국가이고, 문화적으로도 월드스타가 나온 건 물론 세계 곳곳에 한류의 열기가 뜨겁다. 그런데도 우리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건 우리가 게으른 탓일까? 아니면 힘을 합치지 않아서일까? 새 대통령이 말하는 '국민 행복'을 이루기 위해 정부가 뭘 하겠다는 건지, 우리는 뭘 해야 하는지 취임사에선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남은 5년이 미덥지 않은 건 이런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