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8. 30. 21:19

(2006년 1월 5일에 썼던 글입니다.)


한국의 영문 표기는 원래 'Corea' 였는데, 일제의 조작에 의해 'Korea'로 바뀌었다는 주장은 정말 오래 된 이야기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알고계실 정도니 모르긴 해도 수십년은 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이 주제에 관한 남북 학자간의 학술회의까지 열리게 된다.

물론 미몹까지 오시는 분들 중에 그런 주장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Corea'에 향수(?)를 갖는 분들이 적지 않은만큼, 이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짓고 가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이전에 썼던 글에서('Corea'논쟁은 이제 그만!!) 일본이 Corea를 Korea로 바꿀 현실적인 이유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식과 논리적 추측일 뿐이었던 터라 실증적인 근거는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하의 내용은 <역사와 현실> 58호(2005년 12월)에 실린 '국호영문표기, Corea에서 Korea로의 전환과 의미'(이영호)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본문중의 실증 자료들의 내용과 출처가 궁금하거나 이 글이 못 미더운 분들은 그 논문을 읽어보시면 되겠다. <역사와 현실>은 '한국역사연구회(www.koreanhistory.org)'에서 발행하는 계간 학술지이다.


우리가 Corea라고? 무엄하도다!

서양 국가들과 교류가 없었던 조선은 나라 이름을 영어 등의 외국어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 고민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서양에서 조선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1880년대 들어 외국과 국교 교섭을 하면서 조선은 비로소 외국에서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1880년, 미국정부는 해군제독 슈펠트를 통해 통상교섭을 요청하는 서신을 조선정부에 제출한다. 그러나 조선은 이 서신의 접수를 거부했다. 조선의 국호를 Great Corea(대고려, 大高麗)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킨 후 건국되었다. 망국의 국호를 가지고 자신들을 일컬었으니 결례도 이만한 결례가 없다. 조선은 '조선의 국호는 조선(Chosen)'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조선 정부로서는 Corea이든 Korea이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서신 접수를 거부당한 슈펠트는 'Great Corea'이든 'Great Chosen'이든 무슨 상관이냐며 불평하고 있는데, 어쨌든 조선은 국호 표기로 Chosen을 고집했고 결국 조미수호조약은 Chosen이라는 이름으로 체결된다.

조선은 영문 국호를 Chosen으로 확립하기 위해 여러차례 시도했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은 '고종'을 'The King of Tah Chosun(대조선 국왕)'으로 번역했으며, 사절단의 공문서도 Corean Special Mission을 Chosunese Special Mission으로 수정한다. Chosunese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Chinese, Japanese와 대응되는 형태로서 Chosun의 소유격을 정하여 Chosun(Chosen)을 정식 표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조선을 소개하는 서양인들의 몇몇 저술도 'Corea'와 'Chosen'의 구분을 촉구하고 있다.

'Korean들이 자기 땅에 붙인 이름은 Chosun이다...그 중간에 있는 왕국은 Koryo로 불렸고 거기에서 우리가 부르는 이름 Korea가 나왔다'(Percival Lowell, Choson: The Land of Morning Calm, 1886)

'Corea나 Korea라는 이름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Corea 사람들에게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말을 결코 자기 나라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지금 쓰고 있는 고유한 나라 이름은 Chosen이다...Chosen은 지금 원주민들 자신이 부르는 유일한 국명이다...Corea는 사장된 나라 Korai의 변조일 뿐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Henry Savage-Landor, 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

사회화된 언어, 관행의 위력

그러나 Corea라는 이름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Corea가 아니라 Chosun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Chosun이 무엇인지를 지칭하기 위해서는 다시 Corea라고 써야했다. 조선을 Corea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Corea라는 말을 쓰지 않고는 의사소통이 곤란했던 것이다. 국호로서 Chosun을 관철하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은 역부족이었고, 결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와의 통상조약이 Corea의 이름으로 체결된다. 조선은 5백년 전에 망한 나라의 이름으로 자신을 대표해야 하는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Corea인가 Korea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두 용법이 경합을 벌이게 된 것은 1880년대 중반부터이다. 외교문서 담당자의 용례를 보면, 청나라의 추천으로 1882~1884년간 외교고문으로 근무한 묄렌도르프는 시종일관 Corea를 사용한다. 그의 후임으로 1886년 부임한 데니는 Corea를 쓰다가 1888년부터 Korea를 사용한다. 청나라의 횡포를 비판한 책자 <청한론(China and Korea)(1888)>는 시종일관 Korea를 쓰고 있다.

그리고 주미조선공사관의 표기가 주목된다. 1888년부터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폐쇄된 1905년까지 주미조선공사가 미 국무성에 보낸 문서는 모두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공사관은 Legation of Korea로 문서 양식에 아예 박혀있고, 내용에서도 오직 Korea만을 사용한다. 다만 고종과 미국 대통령 사이의 서한은 Tah Chosen, Great Chosen을 사용하는데 이건 조약 체결시부터의 관행으로서 예외적인 것이다. 물론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는 The Emperor of Tai Han이나 The King of Korea로 사용한다. 주미조선공사관에서 Korea 표기를 먼저 사용하여 일관성있게 사용한 것은 영문 국호 표기에 대한 조선측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Corea를 Korea로 바꾸었는가

정작 미국 외교관들은 두 표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초대 공사 푸트Foote는 Corea를 사용했지만 그의 후임들은 Korea를 사용했고, 1886년부터 1891년까지는 다시 Corea와 Korea가 섞여쓰이는 가운데, 딘스모어 공사(1887~1890 근무)를 제외한 사람들은 처음에 Corea를 쓰다 나중에 Korea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기간의 국호 표기는 대단한 혼란을 보인다. 서울의 공사관과 워싱턴의 국무성이 다른 표기를 쓰고, Korea로 보낸 전문의 답신은 Corea로 오고, 같은 문서 안에서도 Corea와 Korea가 동시에 쓰이는 등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1891년 10월 경이 되면 조선의 표기는 Korea로 확정되며, 이후 결코 Corea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외교문서는 없다. 그러나 당시 잡지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The Korean Repository의 기사이다.

'...이 왕국의 이름은 독일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의 조약에서 Corea로 기록되어있다...우리는 소멸한 왕조의 이름을 엄연히 존재하는 주권국가에 붙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다수 조약 체결국들의 의향을 기다리는 것이 낫고, 그래서 The Chosen Repository가 아니라 The Korean Repository를 간행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나라 주민들이 표기하는 Korye의 첫번째 글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으며, 여러 문법학자들도 그것을 우리 영어의 k로 표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알다...그래서 미 국무성과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우리가 차용한 이 땅의 이름을 아주 조리있게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5월호)

'이 나라의 이름은 고대에는 Scilla, Korai, 그리고 500여년동안 Chosen이었다. 지금은 Tai Han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계속 부르고 있다. 왕립지리학회는 Korea는 철자 K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영국이나 몇몇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C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K를 사용한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했고, 오히려 그것을 더 좋아한다.'("Preface to first edition : A Chronological Index" 1901, Korea: Fact and Fancy, 1904)

Corea가 Korea로 바뀐 것은 일제의 조작이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미국 국무성의 결정이었고, 이것은 음운학적인 이유였다. 앞서의 잡지를 다시 살펴보자.

'K가 C보다 나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어의 C나 K라는 글자는 Korea 언어로 ㄱ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이 글자는 한국어로 기역으로 발음되지만 만약 우리가 C를 사용한다면 그 이름은 시옷으로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그 글자의 이런 번역으로서 C의 무용성은 Corea라는 철자법이 채용될 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옛 형태를 고집하는 것은 진보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다...그리피스 박사는 수도의 이름을 Seoul이라고 한다. 이것은 Sayool로 발음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10년전 미국에서 받아들인 오래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e를 사용하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 거기에 프랑스식 액센트를 넣는 것은 아주 구제불능이 된다. Korea의 이름들을 번역할 때 일본의 발음을 따르는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인 학자들에게 유익하며, Korea에서 우리에게 끝없이 흥미롭고 신기한 퍼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The Korean Repository 1897년 12월호)

C가 K가 된 것은 발음과 철자법상의 이유였다. 이 글은 오히려 한국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

조선은 1897년 Korea라는 이름으로 국제우편연합에 가입한다. 그러나 조선이 Korea라는 용법을 정식으로 대외에 공표한 것도 아니고(주미조선공사관의 사례를 범정부적 차원으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이다), 국내에서 사용을 통일한 것도 아니다. 청일전쟁 시기에 전장이 된 조선은 Korea로서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매우 많은 서양인들이 Corea라는 표현에 익숙해있었다. 그리고 조선 정부가 국내에서 외국인과 체결한 많은 계약들은 1905년까지도 Chosen, Corea, Korea, Dai Han 등이 원칙없이 섞여 쓰이고 있다. 이영호 교수는 이렇게 된 원인으로 아마도 조선 정부가 아니라 피계약자가 계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부가 공적 행위에서 자신의 이름을 통일되게 표기하지 못했던 것은 조선이 가졌던 근대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표상이 미약했음을 의미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어쨌든 이 논문이 주는 시사점은 대단히 크다. 우리는 '코리아'를 당연한 우리나라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조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조선인들에게 '코리아'라는 명칭은 그야말로 황당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Corea이든 Korea이든 조선인에게는 서양인들이 멋대로 갖다붙인, 망국의 이름의 파생어였을 뿐이다.

뿐만아니라 일본이 영문 국호 표기에 개입한 흔적도 전혀 없다. 그것은 Corea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나 Korea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하지도 않은 피해는 더이상 주장하지 말자. 그래서 '열등감을 동력으로 삼는 민족주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별칭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를 못마땅해한다. 정체되고 낙후된 한국이라는 서양인들의 편견을 여실히 반영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별칭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The Land of Rising Sun'와 비교하면 이런 불만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비록 서양인들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에 '정체된 조선'과 같은 뉘앙스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 자체는 조선(朝鮮)의 뜻을 풀어 번역한 것이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제목을 바꿨습니다(0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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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