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기장2017. 10. 10. 23:07

시라이 사토시(정선태 외 역), <영속패전론>, 2017, 이숲.

 

전후 7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에서는 영원히 패전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패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패전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철학적인 얘기같지만 사실 간단하다. 일본은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인 미국에 대해서는 패전을 불가항력으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종한.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선 패전을 부인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그런데 이같은 횡포는 미국이 뒤를 봐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패전을 부인하는 한 대미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본에는 패전으로 군사적으로는 미일동맹,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 이식됐다. 냉전 기간에는 이런 것들을 '평화와 번영'의 대가로 여기고 본심을 감춰왔지만,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오늘날 '평화와 번영'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보수 정치권은 '전후 체제의 극복'을 내세우며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최소한 겉으로는 전쟁 책임을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드러내놓고 책임을 부인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전후 체제 극복'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말을 하는 정치인들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런 주장은 패전 체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일본 정치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참신한 논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수없이 지적돼온 문제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썼다고 밝힌다(p. 205). 다만 이와 관련한 일본 내부의 논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점은 의미가 있다. 또,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독도, 쿠릴 열도에 대해서도 문제의 근원을 간단하면서 알기 쉽게 정리한 것도 유익하다.

 

(독도에 대해 저자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영토에 해당하므로 포츠담 선언에 따라 포기하는 게 맞다는 취지로 서술하지만, 단정하지는 않는다.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으로 볼 수 없는 '러스크 서한'을 인용한 일본 외무성의 주장을 그대로 긍정하는 한계도 있다. 러스크 서한에 대해선 이 글을 참조).

 

일본의 친미 우익에 관한 묘사는 마치 우리나라 얘기인 듯하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요직을 맡았던 전직 외교관은 미일 외교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본과 미국의 흔들림 없는 유대"라고 답했다고 한다(p. 144). 저자는 수단이어야 할 미일 공조가 목표가 돼버린 엉터리 현실을 보여준다고 개탄하지만, 입만 열면 '굳건한 한미 공조'를 되뇌이는 우리나라 보수층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다만 일본의 '영속패전론'을 곧바로 우리나라의 '영속식민지론'으로 적용하려는 역자의 시도는 비약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보수층의 뿌리깊은 대미 종속의식은 공통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패전은 역사적 사실인 반면, 지금의 한국이 미국, 혹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묘사는 아무리 넓게 봐줘도 비유에 그칠 뿐이다. 식민지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식민지배가 계속된다는 논리 구조도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해결된단 말인가?

 

굳이 한국에 적용한다면 '영속분단론'이 적절할 것이다. 통일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북한과 적대적 공존을 계속해온 반공 보수주의자들. 그러나 이것도 딱 들어맞지는 않고, 우리가 참조할 부분이 있다면 저자가 경고하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이 우리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지 성찰하는 것일 테다.

 

패전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역설. 독재와 인권유린의 어두운 역사를 감추고 억지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려 하는 국내 뉴라이트 학자들이 새겨야 할 점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건 어둠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시민의 힘으로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강자만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는 법이다.

Posted by 술이부작
진짜 잡기장2016. 8. 16. 00:55

김도년·유윤정, <기업의 거짓말>, 시대의창, 2016.


우리나라에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책에 소개된 사례는 국내 기업만 20곳에 육박한다. '코어비트'같은 중소기업부터 효성그룹, SK글로벌 등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분식이 확인된 게 아니라 의혹에 그친 경우도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곳도 있긴 하지만 주제엔 변함이 없다.


외부 감사까지 받는 회계장부를 조작하기 위해 기업은 어떤 수법을 쓸까? 책에 등장한 기업들을 보면 허위 매출, 대손충당금 축소, 대출 기재 누락, 재고자산 부풀리기, 특수목적법인(SPC)과의 거래, 허위 자산 등록, 비용에 해당하는 연구개발비를 자산으로 처리, 비상장주식·무형자산 가치 부풀리기 등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중소기업도 대기업도 분식회계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고, 정부 포상을 받은 기업도, 공공기관의 보증을 받은 기업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실제로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모뉴엘, 네오세미테크는 국무총리상, 장관상을 받은 기업이다. 그렇다면 일반인, 또는 기자는 분식회계를 어떻게 발견해낼 수 있을까?


쉬운 일은 아니다. 회계사도 걸러내지 못한 조작을 비전문가가 어떻게 집어낼까. 다만 저자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매출이 늘어나는데 재고가 늘어난다면 의심해볼만하다(상품이 잘 팔리는데 재고가 늘어난다?). 매출이 늘어나는데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적자라면 의심해볼만하다(장사가 잘 되는데 돈이 안 들어온다?). 유형자산이 늘었는데 감가상각비가 늘지 않으면 의심해볼만하다(설비가 늘면 감가상각비는 당연히 늘어야). 하지만 이것도 특수한 사례일 뿐이지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건 아니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분식회계 사건, 막을 방법은 없나? 기업에서 일감을 따와야 하는 애널리스트와 회계법인은 '을'일 수밖에 없고, 기업 2만 2천 곳의 재무제표를 감리할 금융감독원 인력은 30명에 불과한 현실에서 분식회계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은 쉽고 술술 읽힌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난 뭘 기대한 걸까? 다 읽고서 생각해보니 나는 회사 내부 인물들이 회계장부를 어떻게 조작하는지 소설처럼 재현한 드라마틱한 글을 기대했던 것같다. 물론 무리라는 건 인정한다. 기업 한 곳의 얘기만으로 책 한 권이 될 거다. 다만 분식회계를 얘기하면서 굳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나 경제민주화, 프로이트의 '이드'와 '슈퍼 에고'같은 개념을 얘기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대학 시절, 어느새 국가대표로 뛰는 선수들 나이가 내 또래라는 걸 깨닫고 자괴감이 들었더랬다. 이제는 책을 내는 저자들이 내 또래다. 여태 대체 뭐하고 살았는지. 저자 부부도 아마 내 또래로 추정되는데, 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하긴 했지만 사실 변변한 책 한 권 낼 전문분야 하나 없는 기자로서 부러운 게 사실이다. 저자는 최근에도 꾸준히 분식회계 관련 기사를 쓰는 듯하다. 나는 저자와 일면식도 없지만, 현장에서 좋은 활동을 계속 해주길 응원한다.

Posted by 술이부작
외국 이야기2016. 8. 11. 23:26

어떤 키스는 세계를 움직였다. 영화에 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키스. 19세기 말, 스크린에 비친 짧은 뽀뽀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을 지켜야 한다며 궐기했지만, 다른 한편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상영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지금이야 동성 커플의 키스도 대단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키스하는 걸 보고 불쾌해하며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지만,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로 여긴다. 독일에서는.


세계 각국의 황당한 키스금지법


살짝 키스만 해도 감옥에 갈 수 있는 나라가 있다. 예를 들면 두바이. 공공장소에서 키스하는 것은 여기서 엄격히 금지돼있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프르나 인도네시아같은 대부분의 아랍 국가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에서도 키스를 좋게 보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서 로맨틱한 신혼여행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미국의 몇몇 주도 황당한 키스금지법으로 유명하다. 콜로라도 주에서는 자고 있는 부인에게 남편이 키스하는 것이 금지돼있다. 네바다 주에서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키스할 수 없다. 미네소타 주에선 마늘을 많이 먹은 뒤엔 키스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다. 코네티컷 주와 미시건 주에서는 "주의 날(일요일)"에, 더 심하게는 교회 앞에서 키스하는 게 엄격히 금지돼있다.


키스는 몸에 좋다!


종교적인 국가들에선 키스금지법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지만, 미국의 낡은 법들은 대체로 사문화됐다. 그리고 '체액의 교환'에 대해선 수많은 학술적 연구들이 이뤄졌는데, 그 중 중요한 결론은 이렇다.


- 키스하면 살이 빠진다.

- 키스는 건강에 좋다.

- 키스는 피부에 좋다.

- 키스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

- 키스를 통해 옮겨지는 해로운 박테리아는 면역 체계를 강화한다.

키스는 세로토닌, 엔돌핀,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해 행복감을 높여준다.

- 키스를 많이 하는 사람이 직장에서 더욱 성공한다.


심지어 어떤 '키스학자'는 키스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적게 낸다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


키스의 위험


물론 키스 상대에게 면역력이 없는 박테리아를 가진 사람이라면 키스가 위험하다. 또, 전염병이 예보된 경우도 그렇다. 독일은 키스에 관대하지만, 2009년 돼지독감 때문에 파격적인 조치가 내려졌다. 8만 명이 모이는 헤비메탈 페스티벌에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키스 금지령이 내려진 거다.


길고 강렬한 키스에는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입술과 혀의 신경은 중추신경을 거쳐 성기를 직접 자극한다. 애정을 담은 진한 키스일수록 커플은 되도록 빨리 방해받지 않을만한 한적한 장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키스를 즐기는 건 인류의 절반뿐


키스가 사랑의 표현이라는 건 유럽에선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키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2015년 전세계 모든 대륙의 168개 민족을 대상으로 '로맨틱한' 키스에 관해 조사한 연구가 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 연구팀의 결론은 연구 대상이 된 민족의 절반 이상이 키스에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혹은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키스의 기쁨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와 연관돼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아마존 밀림같은 오지 사람들보다 산업화된 지역 사람들일수록 키스를 더 많이 했던 것이다.



Deutsch Welle, 15 unvergessliche Küsse zum Weltkusstag를 번역했습니다. 오역 지적 환영합니다. 참고로 7월 6일은 '세계 키스의 날'이라고 하네요.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