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 사토시(정선태 외 역), <영속패전론>, 2017, 이숲.
전후 7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에서는 영원히 패전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패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패전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철학적인 얘기같지만 사실 간단하다. 일본은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인 미국에 대해서는 패전을 불가항력으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종한다.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선 패전을 부인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그런데 이같은 횡포는 미국이 뒤를 봐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패전을 부인하는 한 대미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본에는 패전으로 군사적으로는 미일동맹,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 이식됐다. 냉전 기간에는 이런 것들을 '평화와 번영'의 대가로 여기고 본심을 감춰왔지만,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오늘날 '평화와 번영'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보수 정치권은 '전후 체제의 극복'을 내세우며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최소한 겉으로는 전쟁 책임을 받아들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드러내놓고 책임을 부인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과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전후 체제 극복'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말을 하는 정치인들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런 주장은 패전 체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일본 정치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참신한 논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수없이 지적돼온 문제이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썼다고 밝힌다(p. 205). 다만 이와 관련한 일본 내부의 논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점은 의미가 있다. 또,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독도, 쿠릴 열도에 대해서도 문제의 근원을 간단하면서 알기 쉽게 정리한 것도 유익하다.
(독도에 대해 저자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영토에 해당하므로 포츠담 선언에 따라 포기하는 게 맞다는 취지로 서술하지만, 단정하지는 않는다.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으로 볼 수 없는 '러스크 서한'을 인용한 일본 외무성의 주장을 그대로 긍정하는 한계도 있다. 러스크 서한에 대해선 이 글을 참조).
일본의 친미 우익에 관한 묘사는 마치 우리나라 얘기인 듯하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요직을 맡았던 전직 외교관은 미일 외교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본과 미국의 흔들림 없는 유대"라고 답했다고 한다(p. 144). 저자는 수단이어야 할 미일 공조가 목표가 돼버린 엉터리 현실을 보여준다고 개탄하지만, 입만 열면 '굳건한 한미 공조'를 되뇌이는 우리나라 보수층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다만 일본의 '영속패전론'을 곧바로 우리나라의 '영속식민지론'으로 적용하려는 역자의 시도는 비약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보수층의 뿌리깊은 대미 종속의식은 공통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패전은 역사적 사실인 반면, 지금의 한국이 미국, 혹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묘사는 아무리 넓게 봐줘도 비유에 그칠 뿐이다. 식민지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식민지배가 계속된다는 논리 구조도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해결된단 말인가?
굳이 한국에 적용한다면 '영속분단론'이 적절할 것이다. 통일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북한과 적대적 공존을 계속해온 반공 보수주의자들. 그러나 이것도 딱 들어맞지는 않고, 우리가 참조할 부분이 있다면 저자가 경고하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이 우리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지 성찰하는 것일 테다.
패전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역설. 독재와 인권유린의 어두운 역사를 감추고 억지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려 하는 국내 뉴라이트 학자들이 새겨야 할 점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건 어둠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시민의 힘으로 극복해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강자만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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