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

언론인으로 남기 힘든 시대 -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술이부작 2013. 4. 17. 22:59

시대가 변했다. 누구나 트위터로, 또는 블로그로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언론은 구태의연하다. 숨겨진 비리를 파헤치는 진짜 탐사보도는 찾기 힘들고, 반면 수사기관 관계자가 흘려준 한두 마디 정보를 부풀려 단독보도라며 홍보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누군가 특종을 쓰면 모든 언론이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베껴쓴다. 때문에 때로는 오보조차 무차별 확산된다.


방송국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을 통해 언론의 질이 높아질 거란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한정된 광고 시장 안에서 각 방송사의 수익은 줄어들었고, 편집진은 제작비가 싸게 먹히는 대담 코너를 크게 늘렸다. 전문가라는 이름의 방송 출연자들은 중립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정파의 논리를 대변할 뿐이다.


정치 보도는 사실 전달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득실을 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싸움을 붙여야 재미있어 보인다며 모든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대결처럼 다뤄지고, 타협은 비겁한 일로 묘사된다. 결과적으로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높아져간다. 기자들은 공익이 아니라 돈, 사주, 아니면 광고주를 위해 일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빌 코바치·톰 로젠스틸, 원저 2007)이 진단한 미국 언론의 현실이다. 이미 다들 느꼈겠지만 놀라울만큼 우리나라 상황과 같아보인다. 한국 언론에 대한 실태 보고서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잘못된 관행과 추락하는 신뢰가 우리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데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일일까.


이런 위기 속에서 다시 시민들에게 신뢰받는 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 저자들이 제안하는 원칙은 제목 그대로 '기본'들이다. 철저한 사실 확인. 권력에 대한 감시. 취재원은 물론 데스크, 광고주를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독립.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시민에 봉사하는 보도. 출입처가 아닌 시민 중심의 보도. 취재 윤리의 준수. 하도 필독서라는 극찬을 여러 군데서 들었던 터라 책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져있던 탓인지 조금은 실망감도 들었다.


다만 미국 전역의 의식있는 언론인들이 모여 몇 년 동안 토론, 조사한 결과를 담고 있는 만큼, 생각해볼 거리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면서 '해체'된 '언론의 객관성'. 우리나라에서도 <신문 읽기의 혁명> 같은 책 이후 객관적인 언론이라는 기대는 사라진 것 같다. 물론 절대적인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배심원은 공정한 평결을 해야 한다', '과학자는 편견 없이 연구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왜 '기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식한 말 취급을 받아야 할까?(p. 79) 기자 자신은 객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객관적인 취재 방법은 가능하다.(p. 134)


시청률을 올리는 법에 대해선 어떨까? 요즘 편집국에서 흔히 말하는 비법은 '선택과 집중'. 시청자들이 관심있는 한두 주제를 최대한 다양한 각도로 오랫동안 집중 보도해야 한다는 거다. 너무 무거운 주제가 아닌 생활 밀착형 주제 등 '소프트한' 뉴스를 발굴하라는 주문도 뒤를 잇는다. 


실제론 어땠을까? "매우 중요하고, 기획력과 균형을 갖춘, 권위 있으며 지역 공동체와 연관성이 깊고, 선정적이지 않은, 60초가 넘는 기사들이, 낮은 질의 뉴스보다 더욱 높은 시청률과 시청자 충성도를 얻은 것으로 밝혀졌다.(p. 282)" 또, "더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룬 방송국이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많은 수용자를 끌어들였다.(p. 308)" 시청률이 잘 나오는 아이템만 다루게 되면 "결국은 특정한 패턴에 갇히고... 결과적으로 뉴스는 나이 많은 사람들만 보는 게 됐고, 더욱 선정적으로 변했다.(p. 317)"


기자들을 닥달하는 데스크라고 이런 원리를 왜 모르겠나. 문제는 "더 좋은 기사로 독자, 시청자를 되찾아 오기는 어렵고 시간도 꽤 걸리며 비용도 많이 든다는 점이다.(p. 285)" 그래서 홍보성 기사로 정권의 지원을 받으려 하거나, 권력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은 기사는 축소하고, 죽이고, 뺀다. 광고주가 요구하는 기사를 실어주거나, 혹은 줄여준다. 진지한 사안은 피하고, 보도 내용은 선정적으로 한다. 기자나 앵커에는 비정규직을 활용한다. 단기적으로야 실적을 올려주는 묘책 같고 그래서 많은 언론사들이 따르고 있는 길이지만, 원래 멸망의 길이 크고 넓은 법이다.


책에는 이 밖에도 취재 기법이나 윤리 같은 면에서 현직 기자들이 보면 도전을 받을만한 내용들이 많이 소개돼있다. 필요한 분들은 직접 읽는 게 나을 것 같아 굳이 몇 줄로 요약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보수 정권 집권 이래 언론인으로 남기 힘든 시대 속에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책이다. 번역이 아주 매끄러운 편은 아니라는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