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
영어 공용화, 아직도 논쟁중?
술이부작
2011. 8. 30. 21:12
(2005년 10월 7일에 썼던 글입니다.)
영어를 한국의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지는 꽤나 오래됐다. 학계에서도 논쟁이 꽤 있었던 걸로도 알고있고, 대중적으로는 홍세화 씨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에서 강력하게 비판한 바가 있었다. 그 외 박노자, 진중권 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논쟁이 정리된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전 국립국어원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정리가 안된 모양이다.
영어 공용화에 대해선 반대(37.3%)와 찬성(36.3%) 의견이 비슷했고, 한자와 영어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각각 78.8%, 75.6%였다. (프레시안 기사 보기)
물론 조사의 초점은 이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한 줄이 내 머리속을 계속 어지럽혔다. 왜 사람들은 영어 공용화에 그렇게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다. 일본에서도 논의가 있고, 대만에서도 그렇다 한다. 심지어는 100년 전에도 이런 논쟁은 있었다.
(일본의) 근대 국가주의적 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모리 아리노리는 1873년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유명한 주장을 하였다. 추상어가 없는 일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서양 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주: 모리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 영어를 국어로 채택할 경우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들은 하나의 국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70쪽.
그 때 일본에서 영어가 국어가 됐다면, 식민지 조선도 조선어 말살정책을 통해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됐을까? 복거일 씨 같으면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할 듯도 하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우선 일상에서 전혀 영어를 쓸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는 영어교육이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우므로, 공용화를 통해 실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영어가 세계의 보편 언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번역, 통역, 외국어 학습 등으로 인력과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이게 과연 정말인지 생각해 보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영어 공용화가 무엇인가?
그런데, 막상 얘기는 많이 해도, 영어 공용화를 정확히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영어 공용화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단 '영어 전용'과 '영어 병용'의 두 종류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용'은 말 그대로 모든 언어생활을 영어로만 하는 것. 한국어는 역사속의 언어로서 폐기될 것이다. '병용'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사용하는 것. '공용화'라고 이름붙일 정도면 영어만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야 할테니, 특히 언론, 교육, 공문서 등은 필히 두 언어가 같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또 어떻게 시행할지 많은 방법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선 이 정도로만 구분하고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해보자.
2. 교육적 효과는 있는가?
공용화로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는 것일 테다. 과연 그런지는 간단한 사고실험으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우선 '병용'의 경우. 그러면 한국어와 영어는 둘 다 공용어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영어 공용화를 실시한다고 내 영어 실력이 어느날 갑자기 원어민 수준으로 짠~ 하고 변하는 게 아니므로, 내 언어 생활은 가능하면 한국어로 이뤄질 것이다. 미디어몹 한글 페이지와 영문 페이지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언어를 선택하겠는가? 글쓰기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분명하다. 한국어로 쓰듯이 영어로 자유롭게 작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병용'을 한다고 해도 영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결국 학습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전용'을 실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미 익숙한 모국어를 버리고 생활에서 외국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자기 돈 내고 참여하는 영어 캠프 같은 데서도, 감시자가 없이 학생들끼리 모여있으면 한국어로 말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어 사용을 강제하려면 일제시대 못지 않은 억압 체제가 필요할 것이다.
즉, 영어 공용화를 실시해도 한국인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 더 대접받을 수는 있겠다. 그 말은 영어를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3.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언어 정책을 '경쟁력'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게 적절한지는 일단 제쳐두고, 과연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면 그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현재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인지 살펴보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2004, 한국문화사)에 정리된 영어 공용 국가의 목록이다(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는 제외).
뉴질랜드, 싱가포르, 아일랜드, 나우루, 몰타, 바하마, 브루나이, 세인트키츠네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팔라우, 가나, 가이아나, 감비아, 그레나다, 나미비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라이베리아, 레소토, 말라위, 모리셔스, 미크로네시아, 바누아투, 바베이도스, 벨리즈, 보츠와나, 사모아, 세이셸,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그레나딘, 솔로몬제도, 스와질랜드, 시에라리온, 앤티가바부다, 에리트레아, 우간다, 인도, 자메이카, 잠비아, 짐바브웨, 케냐, 키리바시, 탄자니아, 투발루, 피지, 필리핀
경쟁력은 고사하고 이름도 처음 듣는 나라가 태반이다. 그나마 뉴질랜드는 백인 이민국가이고, 싱가포르와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지였다. 단지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경쟁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 그리고
통일은 안중에도 없나보지?
5. 그렇지만
이 외에도 영어 공용화가 왜 '말도 안되는 말'인지 수많은 근거가 있지만, 일일이 옮기고 싶지 않다. 관심있으신 분은 위의 책 <~의 말과 삶>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는 그저 이런 현실성도 없고 효과도 없을 주장이 진지한 고민거리가 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영어는 외국어다. 외국어는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된다. 정말 필수적인 수준만큼은 공교육에서 보장해줘야겠고. 그러니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수사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냥 '말도 안되는 말'로 치부하고 있다가는 크게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듣자하니 LG전자는 2008년부터 사내에서 영어 공용화를 추진한다고 한다. LG전자는 영어권 국가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건지, 이를테면 프랑스 법인이나 스페인 지사에서도 영어로 업무를 하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사기업에서 손해볼 짓을 할리는 없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 검토했겠지. 그러나 이게 점차 확산돼서 LG 그룹 전체로,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면? 그래서 영어가 사실상 비공식적으로 공용어가 되어 '상류 언어'가 된다면?
모르겠다. 그런 상황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고 말하면,
'니가 영어 못하니까 그런 거지? 찌질이 같으니.'
이런 면박을 듣게 되는 걸까.
그래서 나는 논쟁이 정리된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전 국립국어원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정리가 안된 모양이다.
영어 공용화에 대해선 반대(37.3%)와 찬성(36.3%) 의견이 비슷했고, 한자와 영어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각각 78.8%, 75.6%였다. (프레시안 기사 보기)
물론 조사의 초점은 이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한 줄이 내 머리속을 계속 어지럽혔다. 왜 사람들은 영어 공용화에 그렇게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다. 일본에서도 논의가 있고, 대만에서도 그렇다 한다. 심지어는 100년 전에도 이런 논쟁은 있었다.
(일본의) 근대 국가주의적 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모리 아리노리는 1873년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유명한 주장을 하였다. 추상어가 없는 일본어를 가지고는 도저히 서양 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주: 모리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 영어를 국어로 채택할 경우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들은 하나의 국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70쪽.
그 때 일본에서 영어가 국어가 됐다면, 식민지 조선도 조선어 말살정책을 통해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됐을까? 복거일 씨 같으면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할 듯도 하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우선 일상에서 전혀 영어를 쓸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는 영어교육이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우므로, 공용화를 통해 실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영어가 세계의 보편 언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번역, 통역, 외국어 학습 등으로 인력과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이게 과연 정말인지 생각해 보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영어 공용화가 무엇인가?
그런데, 막상 얘기는 많이 해도, 영어 공용화를 정확히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영어 공용화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단 '영어 전용'과 '영어 병용'의 두 종류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용'은 말 그대로 모든 언어생활을 영어로만 하는 것. 한국어는 역사속의 언어로서 폐기될 것이다. '병용'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사용하는 것. '공용화'라고 이름붙일 정도면 영어만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야 할테니, 특히 언론, 교육, 공문서 등은 필히 두 언어가 같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또 어떻게 시행할지 많은 방법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선 이 정도로만 구분하고 본격적으로 검토를 시작해보자.
2. 교육적 효과는 있는가?
공용화로 영어 실력이 향상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는 것일 테다. 과연 그런지는 간단한 사고실험으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우선 '병용'의 경우. 그러면 한국어와 영어는 둘 다 공용어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영어 공용화를 실시한다고 내 영어 실력이 어느날 갑자기 원어민 수준으로 짠~ 하고 변하는 게 아니므로, 내 언어 생활은 가능하면 한국어로 이뤄질 것이다. 미디어몹 한글 페이지와 영문 페이지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언어를 선택하겠는가? 글쓰기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욱 분명하다. 한국어로 쓰듯이 영어로 자유롭게 작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병용'을 한다고 해도 영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미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결국 학습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전용'을 실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미 익숙한 모국어를 버리고 생활에서 외국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자기 돈 내고 참여하는 영어 캠프 같은 데서도, 감시자가 없이 학생들끼리 모여있으면 한국어로 말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어 사용을 강제하려면 일제시대 못지 않은 억압 체제가 필요할 것이다.
즉, 영어 공용화를 실시해도 한국인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 더 대접받을 수는 있겠다. 그 말은 영어를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3.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언어 정책을 '경쟁력'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게 적절한지는 일단 제쳐두고, 과연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면 그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현재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인지 살펴보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2004, 한국문화사)에 정리된 영어 공용 국가의 목록이다(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는 제외).
뉴질랜드, 싱가포르, 아일랜드, 나우루, 몰타, 바하마, 브루나이, 세인트키츠네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팔라우, 가나, 가이아나, 감비아, 그레나다, 나미비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라이베리아, 레소토, 말라위, 모리셔스, 미크로네시아, 바누아투, 바베이도스, 벨리즈, 보츠와나, 사모아, 세이셸,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그레나딘, 솔로몬제도, 스와질랜드, 시에라리온, 앤티가바부다, 에리트레아, 우간다, 인도, 자메이카, 잠비아, 짐바브웨, 케냐, 키리바시, 탄자니아, 투발루, 피지, 필리핀
경쟁력은 고사하고 이름도 처음 듣는 나라가 태반이다. 그나마 뉴질랜드는 백인 이민국가이고, 싱가포르와 아일랜드는 영국 식민지였다. 단지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경쟁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 그리고
통일은 안중에도 없나보지?
5. 그렇지만
이 외에도 영어 공용화가 왜 '말도 안되는 말'인지 수많은 근거가 있지만, 일일이 옮기고 싶지 않다. 관심있으신 분은 위의 책 <~의 말과 삶>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는 그저 이런 현실성도 없고 효과도 없을 주장이 진지한 고민거리가 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영어는 외국어다. 외국어는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배우면 된다. 정말 필수적인 수준만큼은 공교육에서 보장해줘야겠고. 그러니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수사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냥 '말도 안되는 말'로 치부하고 있다가는 크게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듣자하니 LG전자는 2008년부터 사내에서 영어 공용화를 추진한다고 한다. LG전자는 영어권 국가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건지, 이를테면 프랑스 법인이나 스페인 지사에서도 영어로 업무를 하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사기업에서 손해볼 짓을 할리는 없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 검토했겠지. 그러나 이게 점차 확산돼서 LG 그룹 전체로,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면? 그래서 영어가 사실상 비공식적으로 공용어가 되어 '상류 언어'가 된다면?
모르겠다. 그런 상황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고 말하면,
'니가 영어 못하니까 그런 거지? 찌질이 같으니.'
이런 면박을 듣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