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
일본이 보는 한국 - 에필로그
술이부작
2011. 8. 29. 21:25
(2005년 2월 23일에 쓴 글입니다.)
일본이 보는 한국
※ 이 글은 기무라 칸(木村幹)의 <한반도를 어떻게 볼까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를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중의 '조선반도', '북조선', '일한', '일조'는 각각 '한반도', '북한', '한일', '북일'로 옮겼으며, '조선', '조선인'은 1945년 이전을 지칭할 경우는 그대로 '조선', '조선인', 그 이후일 경우는 경우에 따라 한국, 한반도, 한국인 등으로 옮겼습니다.
2004년 5월에 발매된 이 책은 일본내 한류 열풍으로 인해 변한 상황을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가졌던 과거의 인식은 현재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탈고정관념'을 표방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제3의 시각'이 무엇인가 정도로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의견이나 보충 설명 등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꺼리지 않고 달아주시면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8. 에필로그 - 무엇을 위해 한반도를 볼까
- 매뉴얼을 믿지 마라
어쨌든 이런 방식을 하나씩 확실히 해가면, 지금까지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겠군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아니 아니, 나의 설명이 잘못된 것 같다. '그'는 조금 많이 빗나갔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해야겠다.
당연시되어왔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자신의 시각을 세운다. 그것은 기존의 패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새로운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노력에 비유할 수 있다. 패션 잡지를 사모으고 유행하는 가게에서 유행하는 옷과 악세사리를 산다고 자신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결국은 거리의 인파속에 파묻혀버린다. 모두가 같은 잡지를 보고 같은 옷을 사면 거기에서 개성같은 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개성을 나타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개성과는 가장 멀어지게 된다.
한반도에 대한 기성의 시각에 질려 자신의 시각을 만드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소개한 방법은 간단하며, 스스로 시행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여태까지의 고정관념에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정관념이 더해질 뿐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아무리 참신하고 세련된 방법을 써도, 그 결과 또다른 고정관념이 생길 뿐이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 '올바른 시각'따위는 없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대체 뭡니까? 저 나름의 올바른 시각을 가지려고 열심히 메모하며 들었는데...
마술을 보여주고 스스로 비법을 공개하는 모양이 돼서 민망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것중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올바른 시각'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반도와 그 두 나라, 사람들을 세계 다른 나라나 사람과 똑같이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있을까? 그런 게 있을리 없다. 다양한 목적으로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갖게되는 인상과 이해는 모두 다르다.
오래 머물러서 그 나라를 잘 아는 사람의 시각을 '올바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관광지만 급하게 찍고 돌아온 사람이 본 모습은 '가짜'일까? 오래 머문 사람은 그 나라에 익숙해져서 처음의 감수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오히려 단기 방문자, 특히 그 나라를 처음 찾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그렇기 때문에 발견하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어느 나라에 머무르면 자연히 그 나라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익히게 된다면, 우리는 먼 옛날에 우리가 사는 일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익혔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게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부분은 그런 걸 생각해본 일도 없을 것이다.
'올바른 시각'은 존재하지 않고, 필요도 없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은 일상의 생활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 상상력을 가지고
'올바른 시각'이 없다면, 한반도를 공부하는 의미는 도대체 뭡니까? 목표가 없다면 열심히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없듯이 '한반도에 대한 올바른 시각'도 없다. 하지만 그것과 한반도에 대해 아는 것의 가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반도에서는 7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고있고, 과거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 이렇게 많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에게 '조선의', 아니면 '한국의', '북한의' 같은 수식어를 씌워 무언가 고정된 '올바른' 모습이 있는듯이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 한반도 사람들의 삶은 그런 단순화된 이해보다 훨씬 다양하고 변화로 가득 차있다.
한번 더 식민지배기의 예를 생각해보자.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도 여러 모습의 삶을 살았다. 식민 통치의 수혜자도 있고, 빈곤과 차별에 괴로워하며 굴욕에 찬 시기를 보낸 사람도 있다. 양측에 있어 그들이 보낸 시대와 사회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좋았는가, 나빴는가, 그것은 후세의 해석에 의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으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다는 것, 그것뿐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이나 집권층이 보는 북한과, 기아로 국경을 넘는 사람이 보는 북한은 다르다. 어느 한쪽이 맞는 게 아니다. 양쪽 다 현실의 일면을 반영하고있고, 한 쪽을 놓친 채로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의 '올바른 모습'을 가르쳐주는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일본인'이 없듯이, '평균적 한국인', '전형적 북한인'도 없다. 한반도를 이해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전형적' 인간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다양한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자료, 연표, 서적, 여행, 출장, 유학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자료이다. 과거의 사람들과는 직접 대화할 수도 없고,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인생을 처음부터 경험할 수는 업삳.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할 수 없으니까 해봤자 소용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주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시행착오를 겪는다. 우리는 자녀를, 연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노력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들은 소중한 사람이고,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좋든 싫든 오늘의 우리에게 한반도와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여서가 아니라 세계 주요 지역의 하나로서, 미국이나 중국, 유럽이 그렇듯이 한반도는 장래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중요한 지역'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를 가능한 한 원만히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것이다.
'올바른 시각'은 없다. 하지만 추상적 논의를 떠나, 한반도의 개개인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는 착실히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다. 한반도의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 태어나 특정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왔을까, 그리고 같은 상황에 놓일 때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나의 상상이 현실의 사람과 조금이라도 일치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반도를 '공부하는' 것은 타인의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데도 결코 끝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도를 일상적으로 한다. 때로는 틀리기도 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거리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느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는 힘이 어느새 훨씬 깊어진 것을. 한반도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공부하는' 것이다.
- 에필로그
어느새 어두워졌군요. 선생님도 바쁘실테니,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도 꽤 긴 대화를 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때로 선배 교수들에게 꾸중을 듣는다. 요즘은 대학도 업무가 많으니, 행정 업무에도 시간을 더 내달라고. 써야하는 원고도 쌓여있고, 오늘도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
그런 건 뭐 아무래도 좋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늘 연구실을 찾아온 '그'가 나의 '특별 세미나'를 잘 이해했는가이다.
결국 내가 '그'에게 하고싶었던 말은, 한반도가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다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논할 수 있다. 그건 결코 어렵지 않다. 다른 나라에 관해 우리가 늘 해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에콰도르, 서사모아에 대해서라면 상식도 편견도, 고정관념도 없고,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과도 솔직히 마주할 수 있다. 한반도에 대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어쩌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기 위해서는 때로 멀리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우리는 한국과 북한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은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는 나라'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고대로부터 계속된 교류의 역사와 현재 한층 활발해진 교류의 결과, 한반도는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한반도 없는 일본사는 생각할 수 없고, 한반도의 여러 상품과 산물도 우리 생활 깊이 들어와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반도와 세계 다른 지역을 같은 거리에 두고 바라보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바라본다 - 그것은 우리 자신속에 있는 한반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로 보고, 나아가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분명 당신에게도 한반도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
연구실 문은 열어두자. 어쩌면 이번에는 당신이 한반도의 문을 두드릴 차례일지도 모르니.
어쨌든 이런 방식을 하나씩 확실히 해가면, 지금까지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겠군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아니 아니, 나의 설명이 잘못된 것 같다. '그'는 조금 많이 빗나갔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해야겠다.
당연시되어왔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자신의 시각을 세운다. 그것은 기존의 패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새로운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노력에 비유할 수 있다. 패션 잡지를 사모으고 유행하는 가게에서 유행하는 옷과 악세사리를 산다고 자신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결국은 거리의 인파속에 파묻혀버린다. 모두가 같은 잡지를 보고 같은 옷을 사면 거기에서 개성같은 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개성을 나타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개성과는 가장 멀어지게 된다.
한반도에 대한 기성의 시각에 질려 자신의 시각을 만드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소개한 방법은 간단하며, 스스로 시행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여태까지의 고정관념에 또 하나의 새로운 고정관념이 더해질 뿐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아무리 참신하고 세련된 방법을 써도, 그 결과 또다른 고정관념이 생길 뿐이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 '올바른 시각'따위는 없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대체 뭡니까? 저 나름의 올바른 시각을 가지려고 열심히 메모하며 들었는데...
마술을 보여주고 스스로 비법을 공개하는 모양이 돼서 민망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것중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올바른 시각'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반도와 그 두 나라, 사람들을 세계 다른 나라나 사람과 똑같이 바라보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미국이나 영국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있을까? 그런 게 있을리 없다. 다양한 목적으로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갖게되는 인상과 이해는 모두 다르다.
오래 머물러서 그 나라를 잘 아는 사람의 시각을 '올바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관광지만 급하게 찍고 돌아온 사람이 본 모습은 '가짜'일까? 오래 머문 사람은 그 나라에 익숙해져서 처음의 감수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오히려 단기 방문자, 특히 그 나라를 처음 찾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신선하고, 그렇기 때문에 발견하게 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어느 나라에 머무르면 자연히 그 나라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익히게 된다면, 우리는 먼 옛날에 우리가 사는 일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익혔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게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부분은 그런 걸 생각해본 일도 없을 것이다.
'올바른 시각'은 존재하지 않고, 필요도 없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은 일상의 생활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시행착오를 거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에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 상상력을 가지고
'올바른 시각'이 없다면, 한반도를 공부하는 의미는 도대체 뭡니까? 목표가 없다면 열심히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없듯이 '한반도에 대한 올바른 시각'도 없다. 하지만 그것과 한반도에 대해 아는 것의 가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한반도에서는 7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고있고, 과거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 이렇게 많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이들에게 '조선의', 아니면 '한국의', '북한의' 같은 수식어를 씌워 무언가 고정된 '올바른' 모습이 있는듯이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 한반도 사람들의 삶은 그런 단순화된 이해보다 훨씬 다양하고 변화로 가득 차있다.
한번 더 식민지배기의 예를 생각해보자.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도 여러 모습의 삶을 살았다. 식민 통치의 수혜자도 있고, 빈곤과 차별에 괴로워하며 굴욕에 찬 시기를 보낸 사람도 있다. 양측에 있어 그들이 보낸 시대와 사회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좋았는가, 나빴는가, 그것은 후세의 해석에 의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으며 그 속에서 느끼고 생각했다는 것, 그것뿐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이나 집권층이 보는 북한과, 기아로 국경을 넘는 사람이 보는 북한은 다르다. 어느 한쪽이 맞는 게 아니다. 양쪽 다 현실의 일면을 반영하고있고, 한 쪽을 놓친 채로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의 '올바른 모습'을 가르쳐주는 '평균적이고 전형적인 일본인'이 없듯이, '평균적 한국인', '전형적 북한인'도 없다. 한반도를 이해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전형적' 인간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 다양한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자료, 연표, 서적, 여행, 출장, 유학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자료이다. 과거의 사람들과는 직접 대화할 수도 없고, 현재의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인생을 처음부터 경험할 수는 업삳.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할 수 없으니까 해봤자 소용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주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시행착오를 겪는다. 우리는 자녀를, 연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노력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들은 소중한 사람이고,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좋든 싫든 오늘의 우리에게 한반도와의 관계는 단절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웃나라여서가 아니라 세계 주요 지역의 하나로서, 미국이나 중국, 유럽이 그렇듯이 한반도는 장래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중요한 지역'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를 가능한 한 원만히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 시행착오를 계속하는 것이다.
'올바른 시각'은 없다. 하지만 추상적 논의를 떠나, 한반도의 개개인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는 착실히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다. 한반도의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 태어나 특정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왔을까, 그리고 같은 상황에 놓일 때 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나의 상상이 현실의 사람과 조금이라도 일치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반도를 '공부하는' 것은 타인의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듯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는 데도 결코 끝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도를 일상적으로 한다. 때로는 틀리기도 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거리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느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는 힘이 어느새 훨씬 깊어진 것을. 한반도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공부하는' 것이다.
- 에필로그
어느새 어두워졌군요. 선생님도 바쁘실테니,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도 꽤 긴 대화를 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때로 선배 교수들에게 꾸중을 듣는다. 요즘은 대학도 업무가 많으니, 행정 업무에도 시간을 더 내달라고. 써야하는 원고도 쌓여있고, 오늘도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
그런 건 뭐 아무래도 좋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늘 연구실을 찾아온 '그'가 나의 '특별 세미나'를 잘 이해했는가이다.
결국 내가 '그'에게 하고싶었던 말은, 한반도가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다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논할 수 있다. 그건 결코 어렵지 않다. 다른 나라에 관해 우리가 늘 해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에콰도르, 서사모아에 대해서라면 상식도 편견도, 고정관념도 없고,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과도 솔직히 마주할 수 있다. 한반도에 대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어쩌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기 위해서는 때로 멀리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우리는 한국과 북한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은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는 나라'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고대로부터 계속된 교류의 역사와 현재 한층 활발해진 교류의 결과, 한반도는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한반도 없는 일본사는 생각할 수 없고, 한반도의 여러 상품과 산물도 우리 생활 깊이 들어와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반도와 세계 다른 지역을 같은 거리에 두고 바라보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바라본다 - 그것은 우리 자신속에 있는 한반도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로 보고, 나아가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분명 당신에게도 한반도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
연구실 문은 열어두자. 어쩌면 이번에는 당신이 한반도의 문을 두드릴 차례일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