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
일본이 보는 한국(5) - 식민지배 대논쟁
술이부작
2011. 8. 29. 21:21
(2005년 2월 13일에 썼던 글입니다.)
일본이 보는 한국
※ 이 글은 기무라 칸(木村幹)의 <한반도를 어떻게 볼까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를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중의 '조선반도', '북조선', '일한', '일조'는 각각 '한반도', '북한', '한일', '북일'로 옮겼으며, '조선', '조선인'은 1945년 이전을 지칭할 경우는 그대로 '조선', '조선인', 그 이후일 경우는 경우에 따라 한국, 한반도, 한국인 등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일본내 사정에 정통하지 못하며, 이 책은 일본 내 한국 논의를 대표하는 책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탈고정관념'을 표방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제3의 시각'이 무엇인지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의견이나 보충 설명 등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꺼리지 않고 달아주시면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제5연습 - 해결 불가능한 대논쟁?
- 황폐한 논의의 반복
계속 여쭙게 되어 죄송하지만, 식민 지배에 대해서 좀 더 선생님의 의견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식민 지배에 대한 고정관념을 뒷받침하는 상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이제 해결 불가능한 논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만.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 둘은 한반도의 역사에 관해 완전히 반대방향에서 부딪히고 있어서, 그 논쟁은 때로 해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논의는 과열되고 감정적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은 가능하면 그런 논의를 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두 고정관념의 충돌은 사람들이 한반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전형이 식민 지배를 둘러싼 논의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 것은, 이것이 단순히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일본에 관한 이야기이고, 따라서 일본에 대한 양측의 시각이 짙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부정적 시각'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긍정하고, '긍정적 시각'은 역으로 그것을 부정한다.
말하자면 이 논쟁에서 한반도에 대한 평가와 일본에 대한 평가의 관계는 제로섬 게임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한반도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실은 일본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일본을 찬양하기 위해 한반도를 비방하고, 일본의 무언가(주로 특권층이나 엘리트)를 비판하기 위해 한반도를 예찬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니 여기서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양측이 무슨 말을 하는지 살펴보자. 아래는 '부정적 시각'의 전형적인 글이다.
양반이 지배하던 시대의 사법은 무법한 체포와 태형, 뇌물에 의한 형벌이 횡행했다. 총독부 시대가 되어 의료 개선과 철도 개통, 항만 건설, 각종 공장의 설립 정비 등 공업화 사회로의 진전을 점차 가능하게 하는 여러 시설이 생겼다. 이런 식민지는 당시 세계에 하나도 없었다.(새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국민의 역사>)
이런 주장에 대해 '긍정적 시각' -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측은 같은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조선인이 쌀을 먹는 것은 사치이니 잡곡을 먹으면 된다는 것이 총독부의 농업정책이었다. 따라서 보통은 좁쌀밥을 먹었고, 그것도 없어서 나무 껍질이나 풀뿌리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주장을 식민지배 '긍정론', 후자를 '속죄론'이라 부르자. 한 쪽은 식민지를 장미빛으로 그리고, 다른 쪽은 비참하게 그린다. 어느 쪽의 주장이 틀린 걸까?
- 식민 지배하의 경제발전
알았습니다, 선생님. 이 두 주장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순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모순처럼 보이는 두 주장이 있을 때, '한 쪽이 명백히 틀렸다'는 것 말고도 다른 가능성이 있다. 양측 주장의 대전제 어딘가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서 논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가능성이다.
논점을 조금 정리해두자. 양측의 논쟁에서 최대의 쟁점은, 일본 식민지배 하에서 한반도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었는가의 여부다. 물론 이 외에도 논점은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에 관해 '긍정론'자는 '이 시기 한반도에서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통계상 1인당 역내 총생산이 증가했다는 의미에서 식민지 시기 한반도에는 경제성장이 존재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물가나 임금 등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통계를 남겼고, 거기에 의거해 현대의 학자들은 당시의 경제성장률 등 다양한 지표를 추산하고 있따. 아래 표는 그 중 하나이다.
<대일본제국>내 각 지역 경제성장률(각 5년간 평균치)
|
1919~23 |
1924~28 |
1929~33 |
1934~38 |
일본 본토 |
-0.47% |
2.73% |
1.68% |
3.65% |
조선 |
-0.18% |
1.13% |
1.31% |
5.03% |
대만 |
2.20% |
3.50% |
-1.38% |
4.33% |
이 통계를 보면, '대일본제국' 전체가 극심한 불황을 겪던 1차대전 직후를 제외하고, 한반도의 경제는 때로 일본 본토를 상회하는 속도로 성장을 계속했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 이번에는 '속죄론'자가 제시하는 자료도 보자.
일본 식민지 시기 한반도 쌀 생산량과 유출량(각 3년간 평균치, 단위는 만 석)
|
1915~17 |
1920~22 |
1925~27 |
1930~32 |
생산량 |
1,350 |
1,450 |
1,600 |
1,700 |
유출량 |
200 |
300 |
600 |
700 |
한반도 소비량 |
1150 |
1150 |
1000 |
1000 |
(원문의 그래프를 표로 옮긴 것으로, 수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 역자)
식민지 시기 한반도 경제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가 강력히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위 표에 보이듯, 이 정책의 결과 한반도의 쌀 생산량은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한반도 사람들, 특히 일반 민중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 '속죄론'자들이 드는 것이 위 표에 보이는 소비량이다. 쌀 생산이 증가하고 총체적인 역내 총생산이 증가하는 바로 그 시기에, 한반도 사람들이 소비하는 쌀과 기타 곡물의 양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곡물 소비량의 감소는 사람들의 칼로리 섭취 저하를 의미하고, 한반도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식량조차 얻을 수 없었음을 나타낸다.
일본 식민지 시기 한반도내 1인당 종류별 곡물 소비량(각 4년간 평균치, 단위는 석)
|
1915~18 |
1921~24 |
1926~29 |
1931~34 |
쌀 |
0.7 |
0.64 |
0.5 |
0.45 |
보리 |
0.42 |
0.41 |
0.39 |
0.41 |
좁쌀 |
0.28 |
0.37 |
0.38 |
0.31 |
콩류 |
0.26 |
0.25 |
0.23 |
0.2 |
기타 |
0.31 |
0.35 |
0.31 |
0.28 |
(원문의 그래프를 표로 옮긴 것으로, 수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 역자)
중요한 것은, 위의 세 표 자체에는 기본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는 성장하고 쌀 생산은 증가하는데, 사람들의 생활은 오히려 빈곤해진다. 답은 간단하다. '경제가 성장하는 반면 빈부의 차가 확대되고 있다.'
가난한 한반도에 총독부와 민간 자본이 들어와 '개발'이 시작된다. 한반도 사람들 중에는 지주들을 중심으로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경제적 성공을 이룬 자도 있다. 하지만 이런 풍부한 자금 유입과 자본 수입은 한반도에 급격한 물가 상승을 가져왔다. 당시 일본은 쌀 파동 직후로, 쌀 업자는 경쟁적으로 한반도의 쌀을 사들였다. 쌀값은 오르고, 쌀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곡물에 의지하게 되어, 그 결과 다른 곡물 가격도 올랐다.
한편, 사회적 약자인 소작인 등의 수입과 임금은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그대로였다. 그들의 생활은 궁핍해지고, 하루 식사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지주들은 큰 소득을 얻었지만 그걸 다 곡물 소비에 쓸리는 없으니, 한반도 전체의 연간 곡물 총 소비량은 1921~24년 평균 2.02석에서 1931~34년 평균 1.65석까지 감소했다.
이렇게 보면 '긍정론'자가 주장하는 경제성장과 '속죄론'자가 주장하는 사람들의 곤궁함은 실은 하나의 큰 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 글들을 보면, 양쪽 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다.
<긍정론>
이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의 농업에 좋은 것이기만 했다고는 할 수 없고, 생산물의 분배가 불공평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4, 강조는 저자)
<속죄론>
엄밀히 말해 연간 생산량은 겨우 20%정도 증가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에 반출된 미곡은 최초의 예정을 훨씬 뛰어넘었다.(강조는 저자)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 같은 자료에서 다른 결론이?
결국 양측 모두 사용한 자료는 같군요. 하지만 결론은 완전히 다릅니다만..대체 어디서 이렇게 돼버린 걸까요?
'긍정론'도 '속죄론'도 각각 긴 역사를 갖고있다. 두 주장은 대개 '일본이 과거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좋다.
그들에게 있어서 '식민 지배는 선했다(정확히는, 좋은 것도 있었다)', 혹은 '식민 지배는 나쁜 것이고 사죄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자료 등을 써서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해서는 안되는 부동의 사실'이다. 하지만 연구와 자료 발굴이 진행된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대개 한정되어있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가 믿는 정반대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같은 자료를 사용하는 기묘한 상태가 되었다.
'긍정론'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다. 당시 한반도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즉, 이 시기 경제성장은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강제된' 것에 불과하고, 아니라도 그들이 '원해서 획득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 경제원조를 제공하면서 '선의로 돈을 준 것이니 감사하라'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경제성장 시켜줬으니까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일본인의 자기만족밖에 되지 않난다.
'속죄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한반도 사람들의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식민 지배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2차대전 후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도 발견되듯이, 경제성장중의 어느 단계에서 빈부의 차가 확대되는 것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고, 어느정도는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한반도의 경제성장률이 당시 세계 평균보다 높았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성과'를 거둔 일본의 한반도 경제정책은, 타당성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빈부의 차를 일시적으로 벌리지 않고 경제성장을 거둘 다른 방법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 주장의 근거도 확실하다고는 볼 수 없다.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고, 모범답안도 없다. 문제는 오히려, 거기에 한반도 사람들의 의지가 반영되었는가, 여기 있는 것 아닐까.
경제성장이 있었지만, 빈부의 차가 늘어났다 - 이런 한반도의 당시 경제상황만을 들어 간단히 식민 지배가 '좋았다' '나빴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긍정론'자도 '속죄론'자도 그것을 식민 지배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거기에 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제'를 증명하지 못하는 자료를 가지고 마치 그것이 증명된 듯이 말한다. 그건 '논리의 비약'이다. 양측은 결국 당시 경제상황을 '좋다'고 할까 '나쁘다'고 할까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역사적 사실에 차이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관'과 '경제관'에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볼까라는 그들의 논쟁은 '해결 불가능한 대논쟁'이 아니라, 쌍방이 부적절한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관을 외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일본 식민지 지배의 이질성? - 적자의 식민지 지배
즉, 식민 지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인지 '가혹한 것이었다'인지는 경제성장의 유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식민 지배를 둘러싼 논의의 혼란은 실은 이것만이 아니다.
많은 논자가 처음부터 '일본의 식민 지배는 다른 열강의 식민 지배와 크게 다르다'는 전제에 서서 논의하고 있는 점도 혼란의 원인이다. 여기서도 양측의 문장을 뽑아보자. 이 점에 관해 보다 명쾌한 주장을 가진 쪽은 '긍정론' 쪽이다.
둘째로, 일본의 식민지를 유럽의 식민지와 동렬에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중략)..결국, 일본은 대만과 조선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일본인은 식민지를 본국과 같은 수준에 끌어올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이것은 유럽 제국이 식민지에서 대량의 부를 수탈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 4)
이렇게 비교해서는 막연해지지만, '속죄론'에도 같은 형태의 이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긍정론'과 반대로, 일본의 식민 지배는 다른 열강과 달리 가혹한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주지하듯이, 일본은 일찌기 36년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통치했다. 그 36년간의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는가를 오늘날 일본의 젊은 세대는 배우지 않는 탓에 알지 못하는 것 같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 식민주의 국가와 비교해 훨씬 무자비하고 가혹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착취하지 않고, 큰 투자를 해서 역으로 일본에서의 '지출'이 생겼다. 그것은 식민지를 철두철미 착취한 서양 열강과는 다르다 - 이것이 '긍정론'자의 주장이다.
'긍정론'자의 근거는, 식민 지배기 본국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관계를 볼 때 항상 본국 정부에서 조선총독부로 자금이 지출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당시 조선총독부는 본국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관계였다.
조선총독부의 본국 정부에 대한 재정의존도
1911 |
1914 |
1918 |
1922 |
48.3% |
17.2% |
9.0% |
17.8% |
1926 |
1930 |
1934 |
1938 |
8.6% |
2.2% |
2.4% |
13.0% |
하지만 본국 정부가 재정지원을 했다고 해서 착취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도대체 착취라는 것을 어떻게 '계측'하고 평가할 것인가.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식민지로의 재정지원은 정말로 일본 식민 지배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래 표를 보자.
영국령 직할 식민지의 본국 정부에 대한 재정의존도
|
1900 |
1905 |
1910 |
나이지리아 |
17.5% |
43.5% |
12.3% |
황금해안 |
21.0% |
3.5% |
- |
서인도제도 |
2.5% |
1.6% |
1.8% |
키프로스 |
6.0% |
6.7% |
17.4% |
일본이 한반도를 지대하던 시기에 본국에서 재정지원을 받고 있던 식민지의 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위 표에 나온 나이지리아나 황금해안(현재의 가나) 등의 재정의존도는 조선보다도 클 때가 많았다.
16. 17세기 스페인의 중남미 지배는 확실히 현지 사회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식민 지배보다 수백년도 더 전의 일이고, 그것을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난폭한 일이다.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크게 변화한다. 때맞춰 소위 '세기말 공황(19세기 말의 대불황)'의 시기를 맞아, 이 공황으로 큰 손실을 입은 사람들은 그 보전을 위해 정부에 대규모 재정지출을 요구했다. 정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자금지원'의 흐름은 식민지에도 이르렀고, 그 결과 식민지의 재정 지출은 대폭 증가했다. 함께 진행된 열강의 식민지 분할 행진은 식민지 방위를 위한 군사비를 높였다.
이런 적자를 조선총독부같은 식민지 정부가 자력으로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본국 정부에서의 재정지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 시기 세계의 많은 식민지는 급속한 경제성장마저 이룬다. 한반도에서의 재정적자와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속죄론'이 말하는 일본 식민 지배의 '가혹함'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일본의 가혹한 지배의 대표적인 예로, 식민 지배 말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시 시행된 '강제연행'문제가 있다.
현재 보통 '강제연행'이라고 표현되는 것에는 여러 다른 형태가 포함되어있다. 크게는 군인, 군속 등 실질적인 군사력으로의 동원과, 노동자 동원으로 나눌 수 있다.
군사력 동원은 모병과 징병이 있고, 노동력 동원은 '노무동원계획'에 의한 '모집', '국민동원계획'에 의한 '관(官) 알선', 이어서 '국민징용령'에 의한 '징용'이 있다.
1939년 '노무동원계획'으로 시작된 일련의 계획에 의해 동원된 사람의 수는 공식 숫자만도 72만명을 넘는다. 그 배경에는 총력적으로 인한 병력, 노동력 모두의 부족이 있다. 일본은 그것을 한반도 인구로 충당하려 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것이었을까.
2차대전에서 주요 식민지의 군사력 동원
|
동원 수(천 명) |
인구(백만 명) |
인구대비 동원률 |
조선 |
116(군속 제외)
242(군속 포함) |
22.9 |
0.50%
1.06% |
대만 |
80(군속 제외)
207(군속 포함) |
5.2 |
1.53%
3.97% |
영국령 인도 |
2,582 |
318.7 |
0.81% |
영국령 중앙아프리카 |
60 |
4.8 |
1.25% |
영국령 동아프리카 |
100 |
15.8 |
0.63% |
영국령 서아프리카 |
169 |
41.0 |
0.41% |
영국령 서인도제도 |
6 |
3.0 |
0.19% |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
65 |
16.0 |
0.40% |
(동원 수에는 지원병 포함, 영국 식민지의 동원 수는 본국계 주민의 수를 가급적 제외했음, 병력 집계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니 주의)
위 표를 보면, 최소한 군사력 동원에 있어서는 한반도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열강은 국내에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 싸우는 총력적이라는 새로운 전쟁 형식을 개발했다. 당연히 식민지도 동원의 예외가 아니었다. 열강은 식민지의 인적, 경제적 자원을 주저없이 동원했다. 2차대전에서 영국은 인도에서만 258만 명에 이르는 군사력을 동원했다. 그것이 영국의 승리에 담당한 역할은 굉장히 컸다.
노동력 동원도 마찬가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열강은 전쟁 수행을 위해 각 지역에서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했다. 동원된 사람 중 다수가 그로인해 민족의식에 눈떴음은 잘 알려져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강제연행'에 의해 원하지 않은 전쟁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많은 식민지 주민들도 경험한 것이다.
전시동원, 혹은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해서 바로 그것만을 가지고 일본의 식민지배가 특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졸속이다. 문제는 오히려 동원의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동원에 대해 한반도의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라는 그 자체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왜 일본의 지배를 이 정도로까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까. 자료만 만지작거릴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직접 생각해내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닐까?
- 자기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확인해보자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반도를 생각할 때 식민 지배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처럼 보이는 '긍정론' '속죄론' 양측이 실제로는 다른 지역의 식민 지배는 물론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둘러싼 여러 사실조차 상세히 검토하지 않고 제멋대로의 관념에 빠져 논의하기 때문이다. 일본 식민지배의 '특수성'이나, 나아가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라든가 '나쁜 일을 했다' 등의 결론이 고찰 이전에 정해져있는 것이 문제다.
나는 어느 국제 회의에서 저명한 일본인 학자 - 다른 분야 전문가이고, 한반도 역사 전문가는 아니다 - 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한반도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식민 지배에 대해서는 이런 입장에 서고 싶다.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어느 쪽 입장에 설까를 미리 정한다. 윤리적인 입장 표명이 어떻든, 학자로서 이런 자세는 도저히 성실한 것이 아니다.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 일본인 학자의 경우라면, 식민 지배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곧바로 한반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갖고 그 결론을 내렸는가를 명백히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았다' '나빴다'라고 판단했으니, 그 기준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고 결론을 급히 내려고 하니 무엇을 논의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자기 자신이 세운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할리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는 그런 기준이 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답할 사람도 있겠다. 사람이 어떤 기준을 세우려 할 때, 고상한 윤리규범, 국제법 지식, 또는 당시 세계 상황에 대한 여러 정보 등이 어느정도 도움은 되겠다. 하지만 더 단순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당시 한반도 사회에 살았다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약 거기서 어떤 문제점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당시 한반도에서 실제로 식민지배가 행해졌고, 거기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그 평가는 그들의 현실 생활에서밖에 얻을 수 없다. 그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성실하게 과거와 대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생각해보자. 경제적 상황은 좋아졌지만, 자신들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사실상 없고 외국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선생님이나 상사로서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외국인이다. 내가 태어난 땅에서 살고 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외국어를 써야 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말씨를 쓰면 들은 척도 안한다. 출세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인 동료에 비해 내가 불리한 것이 분명하다. 내 이름조차 바꿔야 하고, 불만을 말하면 체포되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 외국인이 지배하는 경찰에 의한 수사와, 우리가 만들었을리 없는 법률에 의한 재판이다. 외국인들은, 노력하면 언젠가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날이 대체 언제인지, 도대체 그들의 말을 믿어도 좋을지조차 알 수 없다.
당신은 이 상황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복잡한 경제 토론같은 것 하지 않아도, 그것이 다른 식민지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그 답은 자명한 것이 아닌가?
판단의 기준은 자기 마음 속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스스로 차분히 이해한 후에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