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

전쟁은 테러를 막지 못한다 - 네팔 내전 이야기

술이부작 2011. 8. 29. 21:02
(2004년 9월 20일에 썼던 글입니다.)


먼 훗날 21세기 초엽의 화두를 꼽는다면 단연 테러리즘이 될 것이다. 탈냉전 시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심장을 강타한 9.11 테러 이후, 테러리즘반테러 전쟁은 국제정치에서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9.11 이전에도 테러는 세계 각지에 존재했고, 미국의 반테러 전쟁 이전에도 반테러 전쟁이 세계 각지에서 펼쳐졌다. 오늘날 차이점이라면 미국이 이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테러와 관련한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테러로부터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며 곳곳에서 펼쳐지는 반테러 전쟁을 보며,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된다. 전쟁은 테러를 막을 수 있는가. 8년째 내전을 겪고 있는 네팔의 사례는 그 답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취약한 민주주의

 

20세기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네팔은 1990년까지 절대 왕권이 통치하는 국가였다고 말하면 자못 충격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민주화 이전의 네팔에도 물론 의회가 있었고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정당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고, 국왕은 내각의 조직권, 군과 경찰의 통수권, 행정권을 포함한 국정 전반에 관한 권리를 보유했다. 그러나 89년부터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폭력 사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이행기를 거쳐 90년에 이르면 다당제와 입헌군주제를 도입,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하게 되었다(이렇게 늦다니, 역시 후진국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 할만할 걸 경험한 것은 87 6월 항쟁 이후부터라고 본다면 그다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도입되었지만, 많은 제3세계 국가가 그렇듯 네팔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 정치적 불안과 부패는 물론, 사회 경제적 사정이 민주화 이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은 국민들이 불만을 갖는 원인이 되었다.

 

- 위험수위의 빈부격차

 

네팔은 세계은행이 분류한 세계 25개 빈곤국 가운데 하나이다. 인구의 42%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경제도 매년 2~3% 정도의 성장률을 나타내는 등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게다가 도시와 농촌간의 빈부격차도 심각한데, 도시지역은 급격히 서구화되고 있는 반면에 농촌 지역은 도로조차 개설되지 않은 곳이 흔하다. 민주화 이후 약속되었던 토지개혁은 지연되고 있고, 네팔 공산당조차 지주계급을 옹호하는 형편이라서 농민들의 박탈감이 팽배해있는 상태이다. 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농촌 인구의 이 같은 불만은, 마오주의 반란이 확산되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 마오주의 운동의 시작

 

네팔의 자칭 마오주의 그룹은 95년 말 정부를 상대로 40개 요구사항을 발표하며 투쟁에 돌입했다. 요구사항은 토지개혁,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정 실시, 인도와의 종속적 조약 폐지, 사회주의적 경제개혁, 다국적 기업 반대 등이었으며, 이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96 2월부터 인민 전쟁(peoples war)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도 개혁 개방을 외치는 이 시대에 마오주의라니? 스스로 마오주의자라고 선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이념적, 사상적으로 얼마나 체계를 갖춘 집단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마오주의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네팔 반군의 요구사항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들이 진짜 마오주의자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관측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이들은 페루의 역시 자칭 마오주의 집단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과 유사하다고 한다(..빛나는 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조사해 올리겠다). 빈부격차의 철폐를 주장하며 스스로 인민을 위해 싸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몇몇 슬로건을 제외하면 구체적 정책 비전은 찾기 힘들어, 아무래도 이념으로 무장했다기 보다는, 사회 경제적 불만세력들이 스스로 마오주의자라고 이름붙였다는 게 적절하지 싶다. 이들 마오주의자들은 원래 네팔 공산당의 일원으로 89~90년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헌법 기초 과정에서 입헌 군주제에 반대해 공화정을 주장하며 탈퇴하여 별도의 조직을 건설하였다. 주류 좌파들은 상위 카스트의 지식인 위주로 구성된 데 반해, 마오주의 그룹은 하위 카스트의 불가촉 천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여성의 가입도 허용되어 30%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차이점이다.

 

 

40개 요구사항에 대한 네팔 정부의 반응은 한 마디로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식이었다. 정부는 마오주의 그룹을 의미있는 정치세력이라고 보지도 않았고, 이후 8년간이나 계속될 내전을 초래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는 공식 논평조차 없이 반군의 요구를 무시했고, 반군은 선언대로 인민 전쟁을 선포했다.

 

-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초기의 반군 활동은 농촌 지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선전 선동과 정부 직원에 대한 산발적인 테러에 그쳤다. 하지만 진압을 위해 경찰력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반군 진압을 위해 경찰력이 크게 증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7천명 정도로 효과적인 작전 수행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훈련도 부족했다. 거기에 위에서는 빨리 반군을 소탕하라고 재촉하고, 옆에서는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재앙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경찰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조금만 의심스러우면 일단 체포해서 감금하여 고문, 폭행하고, 때로는 강간과 살해 또한 서슴지 않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군에 대한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처벌되었다. 모든 주민들을 잠재적 반군으로 취급하는 이러한 정부의 과잉 진압은 거꾸로 주민들이 반군의 편으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민심을 얻고 나면 전쟁은 쉬운 법이다. 반군은 공격의 빈도와 강도를 높이며 점차 네팔 각 지역을 장악해 나갔고, 99년부터는 수도 카트만두에서도 산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반군 진영은 낮춰잡아도 4천여 명의 열성 활동가와 1 5천여명의 게릴라 전사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며, 넓게 보아 6만여 명의 동조자가 있다고 생각된다. 네팔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반군은 전국 75개 지구 중 68개 지구에서 활동중이고, 이 중 32개 지구는 소위 해방구가 되어 실질적인 반군의 통치 아래 놓여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선거와 인민 재판이 실시되었고, 반군 의장은 2001년에 혁명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인민 해방군을 창설함으로써 네팔 사태는 진정한 내전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반군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사태 전개를 보면 웬지 익숙한 그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정부측의 과잉진압과 이에 따른 민심 이반, 사태 악화는 제3세계 내전의 전형적인 도식이기 때문이다. 수단 다르푸르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도, 가까이는 우리나라의 제주 4.3 항쟁이나 광주 5월 항쟁도, 문제를 해결한다며 투입한 공권력이 오히려 사태를 극도로 악화시킨 사례들이다. 더구나 네팔 반군이 초기에 세력을 키우며 활동하던 주요 지역인 중서부 지역은 내전 이전에도 경찰로부터 체포, 고문 등을 자주 당하며 탄압받던 지역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최신 무기, 확대되는 비극

 

처음에 네팔 정부는, 군을 투입하면 자국이 내전 상황에 있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모양이 되어 국제적 이미지가 악화될 것을 우려, 경찰력만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이었지만, 반군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무장 투쟁이 격화되자 군 투입을 승인하게 되었다. 평화적 해결을 위한 반군측과의 협상이 01 7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되면서 포로 석방, 카스트 관련 법 폐지 등의 조치가 있었으나 결국 결렬되고, 반군 측은 카트만두 공항과 네팔 정규군까지 공격하며 전투력을 과시했다.

 

사태의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은 9.11 테러였다. 세계적인 반테러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는 네팔 반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 테러와의 전쟁에 매진하고 있는 네팔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네팔 육군은 이제 미국산 최신 무기를 갖게 되었고, 결과는 19개 마을에서 정부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다. 최근 사망한 1100여명 가운데 800명이 정부군에 의한 사망이었다. 게다가 반군들도 정규군의 무기를 약탈, 노획하면서 교전 양상은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 네팔 미국대사는 계속해서 강경진압을 주장하고 있다. 병력을 증강하고 최신 무기를 도입하면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겠지만, 민심을 잃고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 최근의 상황

 

2001년의 반군의 대규모 공세 이후 네팔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하였다. 02 5월에 총리는 비상사태 확대를 시도하였다가 의회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의회를 해산하였고, 이에 국왕은 총리를 파면하고 선거를 연기함에 따라 현재 네팔은 의회도 없고 헌법은 정지된 비정상적 상황에 놓여있다.

 

반군에 대한 여론은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 농촌지역 주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는, 그렇지 않을 경우 경찰 프락치로 오인받을 것이 두려워서라는 분석도 있지만, 네팔 내 도농간의 격차와 신분 차별, 이에 대한 반군들의 슬로건을 볼 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도시 지역의 지식인층, 이를테면 교사, 작가, 법률가, 학생들도 반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8년째 계속된 내전에 9천여 명이 사망하고, 앞서 얘기했던 미국의 지원 이후 사망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으며, 점차 과격해지는 반군의 활동 방식에 사람들은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집단 강간과 고문, 살해와 같은 반인륜 범죄는 이제 정부군 뿐 아니라 반군 집단들도 자행하고 있으며, 특히 소년병의 징집도 문제가 되고 있다. 매일 17명 꼴로 죽어나가는 상황 하에서, 국민들은 내전 중단과 헌정 회복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01년에 일어난 네팔 왕실의 비극(왕궁 내에서 총격사건으로 국왕 일가가 모두 죽었다) 이후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상당히 하락한 상태이고, 학생들은 공화정 실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기도 한다.

 

지난 8 18일에는 반군이 수도 카트만두를 봉쇄하기도 했다. 봉쇄는 풀리고 현재 평화협상이 진행중이지만, 가까운 시일내에 문제가 해결될지의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 각국의 반응

 

네팔 내전에 가장 큰 위기감을 느끼는 나라는 인도이다. 역사적으로 네팔은 18세기까지 인도 역사의 일부로 다뤄질 뿐 아니라, 현재도 인도는 네팔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네팔의 안보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가 네팔을 병합하려 한다는 등 반인도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인도와의 종속관계 청산, 불평등조약 폐지와 중국-인도간 등거리 외교를 주장하는 네팔 마오주의 반군이 달가울리 없다. 또한 네팔 반군은 인도 북동부의 분리주의 급진단체와 연계하여 무기 및 재정을 조달하고 있으며, 네팔의 불안한 정치상황은 카슈미르  문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인도는 네팔에 헬리콥터 및 기타 무기 지원, 군사 훈련 제공 등 군사적 지원은 물론 반군의 활동 명분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회개선자금의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초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반테러 전쟁 개시 후 새롭게 네팔 내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듯하다. 반군에 장악된 네팔은 테러리스트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 하에 네팔 반군 집단 마오주의 네팔 공산당을 테러 감시 대상에 추가하고, 앞서 말했듯 정부측에 각종 무기를 지원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자금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반군의 마오주의라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네팔 정부측을 지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네팔 내에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인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네팔에 대해 누리던 전통적인 우위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제3세계 분쟁에 대해 그렇듯 우리나라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이외에 별다른 입장이 없는 듯하다. 우리 정부로서는 굳이 반군을 지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과연 전쟁은 테러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테러가 발생하게 되는 정치, 사회, 경제적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첨단 무기로 대테러 작전을 벌인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끊임없는 민족해방운동을 벌이던 우리 자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정부가 참여하는 반테러 전쟁, 평화재건활동,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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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중이기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허구한 날 폭탄이 터지고 시가전이 벌어지는 전시상황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인도 여행 붐을 타고 네팔에 들렀다 오는 한국인들도 꽤나 늘어났다고 들었는데, 현지 사정 자세히 아는 분 있으면 답글 좀 달아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