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기장
필연적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
술이부작
2011. 8. 29. 21:30
(2005년 4월 6일에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민감한(?) 소재를 택하기는 했습니다만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목적이므로, 독자분들께서는 너무 감정이입(?)하지 말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떤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려면 그 행위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과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어야 행위자에 대한 가치판단도 할 수 있고 도덕적 책임도 물을 수 있지 않나 한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프로그램된 기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즉, '자유 의지'는 도덕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어떤 사건이 '필연적인', 혹은 '불가피한' 일이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박정희 옹호론자들이 종종 이같은 논리를 제기한다. 그들에 의하면 제3세계의 정치발전에 있어 쿠데타와 독재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경제 성장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은 불가피했다. 말하자면 '역사적 필연'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되면 박정희는 단지 역사 속에서 누군가 맡아야 할 역할을 했던 것 뿐이므로 그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은 부당하며, 그의 지배기간을 통해 '어쨌든'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를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박정희야말로 민주화의 공로자라는 역설(혹은 궤변)까지 성립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독재와 착취가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역사에 가정은 없다. 60~70년대 독재 없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가능했으리라는 점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반대의 주장도 비슷한 정도로 증명이 가능하다. 결국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념의 영역이다.
경험적으로 보아도 제3세계 여러 국가들의 역사는 독재의 필연성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도대체, 쿠데타를 겪지 않은 제3세계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인도 정도? 그 외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독재와 착취는 정말로, 정도의 차이가 문제일 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두 번째 반론은 이렇게 말한다. 설령 정말로 국가 발전 과정에서 독재와 착취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으로서 박정희는 그것을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에게 당연히 그의 행적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인 박정희'가 아니라 한국의 집권자요 통치자로서의 박정희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으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과 판단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독재와 착취가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박정희가 했던 일들은 결국은 누군가가 언젠가 해야 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오히려 역사의 발전을 위해 악역을 떠맡은 희생양으로 그리는 것도 가능하다.
세 번째 반론은 이렇다. 역사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내리게 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것들은 현재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이고, 부정적인 것, 지양해야 할 것으로 평가하는 것들은 현재에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만적의 봉기가 과거에는 사회 질서의 근본을 뒤흔드는 반란으로 평가되었으나 현재는 신분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서 평가되는 것, 동학 농민운동이 당대에는 사교집단의 폭동으로 규정되었으나 현재는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 규정되는 것 등은 모든 역사적 평가가 현재의 가치를 기준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더이상 독재와 착취를 용인하지 않는다(쓰고 보니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도 들지만,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그렇다고 본다). 그러면 설령 박정희식의 독재와 착취가 역사속에서 불가피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것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또다른 독재, 또다른 억압과 착취가 등장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제국주의, 전쟁,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같은 답변이 가능할 것 같다. 그것들이 설령 당시 시대 조건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해도,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그것들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주제는 성경을 읽던 와중에 떠올랐다. 성경의 서술이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예수는 죽기로 예정된 운명이었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도록 예정되었다. 신이 짜놓은 구원의 드라마에서 유다는 단지 있어야 할 악역을 맡았을 뿐인 것이다. 행동한 것은 어쨌든 유다라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 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예언되었다!).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던 신이 어째서 그 구원을 위해 한 인간을 저주와 파멸로 몰아넣었는가, 이는 많은 회의론자 및 반-기독교론자들이 던지는 전형적인 질문이다.
유다의 배신은 구원 사역을 위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유다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무죄인가? 유다조차 무죄라면 누가 도대체 죄인인가? 아니면 여전히 그는 죄인인가, 선택권조차 없던 그가 그렇다면 왜인가? 앞서의 논법을 따르자면 나의 대답은 이렇게 된다. "설령 그의 배신이 불가피했더라도, 스승을 배신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관에 명백히 위배된다. 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그런데 앞서의 대답은 스스로 나름대로 그럴듯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이 경우는 아무리 봐도 불만스럽다. 정통적,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다.
(이 글은 민감한(?) 소재를 택하기는 했습니다만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목적이므로, 독자분들께서는 너무 감정이입(?)하지 말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떤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려면 그 행위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과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어야 행위자에 대한 가치판단도 할 수 있고 도덕적 책임도 물을 수 있지 않나 한다.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프로그램된 기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즉, '자유 의지'는 도덕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어떤 사건이 '필연적인', 혹은 '불가피한' 일이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박정희 옹호론자들이 종종 이같은 논리를 제기한다. 그들에 의하면 제3세계의 정치발전에 있어 쿠데타와 독재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경제 성장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은 불가피했다. 말하자면 '역사적 필연'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되면 박정희는 단지 역사 속에서 누군가 맡아야 할 역할을 했던 것 뿐이므로 그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은 부당하며, 그의 지배기간을 통해 '어쨌든'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를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박정희야말로 민주화의 공로자라는 역설(혹은 궤변)까지 성립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독재와 착취가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역사에 가정은 없다. 60~70년대 독재 없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가능했으리라는 점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다.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반대의 주장도 비슷한 정도로 증명이 가능하다. 결국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념의 영역이다.
경험적으로 보아도 제3세계 여러 국가들의 역사는 독재의 필연성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도대체, 쿠데타를 겪지 않은 제3세계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인도 정도? 그 외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독재와 착취는 정말로, 정도의 차이가 문제일 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두 번째 반론은 이렇게 말한다. 설령 정말로 국가 발전 과정에서 독재와 착취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으로서 박정희는 그것을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에게 당연히 그의 행적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인 박정희'가 아니라 한국의 집권자요 통치자로서의 박정희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으로서의 박정희에 대한 비판과 판단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독재와 착취가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박정희가 했던 일들은 결국은 누군가가 언젠가 해야 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오히려 역사의 발전을 위해 악역을 떠맡은 희생양으로 그리는 것도 가능하다.
세 번째 반론은 이렇다. 역사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내리게 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것들은 현재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들이고, 부정적인 것, 지양해야 할 것으로 평가하는 것들은 현재에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만적의 봉기가 과거에는 사회 질서의 근본을 뒤흔드는 반란으로 평가되었으나 현재는 신분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서 평가되는 것, 동학 농민운동이 당대에는 사교집단의 폭동으로 규정되었으나 현재는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 규정되는 것 등은 모든 역사적 평가가 현재의 가치를 기준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더이상 독재와 착취를 용인하지 않는다(쓰고 보니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도 들지만,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그렇다고 본다). 그러면 설령 박정희식의 독재와 착취가 역사속에서 불가피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것을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 또다른 독재, 또다른 억압과 착취가 등장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제국주의, 전쟁,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같은 답변이 가능할 것 같다. 그것들이 설령 당시 시대 조건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해도,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그것들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주제는 성경을 읽던 와중에 떠올랐다. 성경의 서술이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예수는 죽기로 예정된 운명이었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도록 예정되었다. 신이 짜놓은 구원의 드라마에서 유다는 단지 있어야 할 악역을 맡았을 뿐인 것이다. 행동한 것은 어쨌든 유다라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 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예언되었다!).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했던 신이 어째서 그 구원을 위해 한 인간을 저주와 파멸로 몰아넣었는가, 이는 많은 회의론자 및 반-기독교론자들이 던지는 전형적인 질문이다.
유다의 배신은 구원 사역을 위한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유다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무죄인가? 유다조차 무죄라면 누가 도대체 죄인인가? 아니면 여전히 그는 죄인인가, 선택권조차 없던 그가 그렇다면 왜인가? 앞서의 논법을 따르자면 나의 대답은 이렇게 된다. "설령 그의 배신이 불가피했더라도, 스승을 배신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관에 명백히 위배된다. 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그런데 앞서의 대답은 스스로 나름대로 그럴듯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이 경우는 아무리 봐도 불만스럽다. 정통적,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