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9일에 썼던 글입니다.)
<기독교와 나> 2차 중간보고
이전에 올렸던 <기독교와 나>와 그 <1차 중간보고> 이후의 상황 보고이다.
이전 글에서는 기독교의 체계나 나의 교회 경험이 다른 종교, 심지어는 세속 단체와도 차이가 없음에 중점을 두었었다. 그러나 다시 두고 고민해 본 결과, 기독교가 다른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각 종교와 사상의 유사성은 오히려 그들이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방향에서 접근해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았다.
I. 죄의 문제, 혹은 양심의 가책에 관하여
내가 봐도 곰팡내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다. 여기서 원죄에 관한 논의나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죄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절대론적 윤리설은 이미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고정불변의 절대적 도덕 원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게 개인이 양심에 따라 내리는 판단이다.
이로써 개인은 세계의 입법자요, 가치의 창조자가 되었다. 자기 행위의 기준은 자기가 세운다. 신의 계명대로, 부모의 말대로, 전통과 관습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난, 모든 가치의 전도!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의 행복을 위한 체계를 스스로 세운다. 신은 죽었다! 이제는 인간이 신을 대신한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체계조차, 자기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조차 인간은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기면서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데도,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짓인데도 자기도 모르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신이 죽었다고 죄까지 죽는 것은 아니다.
신의 죽음이라는 복음을 전해준 니체는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대답하는가? ‘진정한 강자는 자신의 도덕을 방어한다. 도덕은 자기 자신의 강함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면, 너는 너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자기 세계를 완벽히 방어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그 세계를 바꾸기도 원치 않는다면? ‘계속 도전하라!’ 그래도 안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잘났다, 그래 너 루저다!’
자신의 가치관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더욱더 선과 도덕(자신이 만든 것일지라도!)을 추구할수록 죄의식은 더욱더 깊어진다. 선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엄격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행동해도 모든 영역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벗을 수 없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II. 용서의 문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죄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뿐이다. 내가 깡패에게 맞았는데 지나던 사람이 갑자기 깡패에게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라고 말한다면, 나나 깡패나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 당사자, 혹은 최소한 그를 대표?대리한다고 인정될만한 사람뿐이다.
여기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발생한다. 이건 아주 악질의 죄를 지었다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다. 용서해줄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때로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피해자가 소멸하거나 상실된 경우이다.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살아있더라도 연락이 끊어졌거나, 소재를 모르거나, 심지어는 알고 있고 매일 만나더라도 대화할 수 없는 경우, 혹은 집단이나 공동체에 대한 잘못을 범했으나 그 집단이 해체된 경우, 나를 용서해줄 사람은 사라진다.
둘째는 자신의 신념에 반한 죄의 경우. 이때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칠 뿐 나를 용서해줄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남들이 ‘뭐 그런 것 갖고 괴로워하느냐’하고 아무리 얘기해줘야 소용없다. 그게 잘못임을 나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가해자로서이지 피해자로서가 아니므로, 나를 용서할 자격은 없다.
죄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견딜 수 없다. 그에게는 그의 죄를 용서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이로써 신은 존재한다기보다는 요청된다.
그리고 이 ‘죄’와 ‘용서’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는 내가 알기로는 기독교뿐이다.
III. 구원의 문제 - 용서의 원리에 관하여
이에 관해 정통 기독교 교리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였으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기서 온갖 의문부호가 파생된다. 신은 있는가? 그 신은 아들이 있는가? 예수가 정말 신의 아들인가? 그는 정말 부활했는가? 신의 아들이 죽었다 부활한 것과 내 죄의 용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모든 물음에 답하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 7:4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7~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결핍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결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알았고, 그것을 고쳐줄 치유를, 은혜를, 용서를, 자비를 갈구하였다. 진리와 정의의 추구,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한계의 자각, 이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이었다. 아니, 구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죄의 인식이 곧 속죄인 것이다!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0~41)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의인이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죄인이다. 의인이면서도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의인에게 그가 의인임을 일깨워주기에 이 소식은 기쁜 소식, 복음인 것이다.
물론 이 소식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하다. 복음은 확실히 그들의 죄의식을 덜어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용서와 속죄의 소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스스로 건강하다 여기는 자들에게 복음은 필요없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완벽한 인간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스스로 의인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터무니없이 낮은 도덕적 기준 때문이거나, 잘해봐야 자기 기만과 자기 합리화, 위선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IV. 실천의 문제 - 신의 뜻에 관하여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속죄가 가능하다고 해도 범죄 후의 죄책감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괴로워함으로써 용서받은 사람이 그 괴로움을 반복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그리고 예전 나의 비판은 이 지점에 집중됐었다. ‘이것이 옳은 일 - 신의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은 모두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성경은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행위의 기준이 행위 이후에 마련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상, 철학, 정책,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생각이 옳은지는 실천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금리를 인하하면 경기가 회복될지, 두발 자유화를 실시하면 청소년 범죄가 늘어날지, 총파업을 벌이면 노동법이 개정될지, 이 모든 것들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그 방안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평가될 뿐이다. 물론 평가는 ‘올바른 방안이어서 성공했다’라고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공했기 때문에 올바른 방안이 되는 것이다.
각 영역에 있어서 사람들은 나름의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판단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달라진다. 도덕적 판단도 마찬가지다. 양심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해 판단해도 결론은 다를 수 있다. 이 때 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과 싸움은 유보하고, 각자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성경의 권고이다.
한 사람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들이 똑같다고 여긴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요하게 여기고, 고기를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그렇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그러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네가 어째서 네 형제를 판단하는가? 왜 네 형제를 업신여기는가?...우리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자...네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켜라...신념을 갖지 않고 하는 모든 행동이 죄이다(Everything that does not come from faith is sin).(롬 14장 발췌, NIV를 참고로 필자가 수정)
무엇이 선인가, 진리인가, 신의 뜻인가에 대한 경직된 태도는 교조주의와 위선을 낳는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가 좋은 예이다. 결론나지 않을 문제로 서로 자기 주장을 강변할 것이 아니라, 각자 최선의 길을 찾아가며,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그 세계로서 타인을 설득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흔히 비타협적 근본주의자의 온상으로 생각되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야말로, 오히려 다원주의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V. 에필로그 - 생각해 볼 문제들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을 해두고도 ‘중간’ 보고서라 이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 때문이다.
우선 예수의 신성, 내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물론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초자연적 존재, 천지창조, 기적, 내세와 같은 개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신이 두려워서, 지옥이 두려워서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확실히 노예적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초보적 단계의 인류를 위한 은유나 유추로만 이해하기에는 성경에는 기적과 내세에 관한 언급이 너무 많다. 실제로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신의 존재를 믿는 것만큼이나, 믿지 않는 것도 일종의 신앙에 속한다. 필요한 것은 결단인지도 모른다.
둘째로 이상의 내용은 주류 한국 교회의 교리와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얘기를 지껄이다간 당장 이단으로 쫓겨날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건 사실상 무신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양심과 실천이 중요한 거라면,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굳이 신을 상정하는 이유는 있다. 나는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나는 의인이다(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므로). 이건 결국 내가 나를 의인이라고 하는 꼴이다. 상당히 낯간지러운 일이다. 자기합리화라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대신해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비록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무릎꿇고 눈물을 쏟으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참회하고 괴로워하는 정도는 아니라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실천’이겠지만..
끝으로, 이제까지 쓴 글은, 다른 내 글이 언제나 그랬듯이 별로 새로운 내용도 아니고 완전한 나의 창작도 아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서울 모 교회에 다니는 나의 친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III.에서 다룬 내용은 그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C. S. 루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니, 그의 생각도 이 글에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혹시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 생각해 볼 문제
(생각이 끝나면 또 글 올려보겠습니다)
1.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은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고유한 특색인가, 아니면 모든 인류의 공통된 문제인가? 기독교 전래 이전의 동양 문헌들을 바탕으로 탐구해 보자.
2. 성경의 기록들에 대하여 얼마나 역사성 혹은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성서고고학, 비교종교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알아보자.
<기독교와 나> 2차 중간보고
이전에 올렸던 <기독교와 나>와 그 <1차 중간보고> 이후의 상황 보고이다.
이전 글에서는 기독교의 체계나 나의 교회 경험이 다른 종교, 심지어는 세속 단체와도 차이가 없음에 중점을 두었었다. 그러나 다시 두고 고민해 본 결과, 기독교가 다른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각 종교와 사상의 유사성은 오히려 그들이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방향에서 접근해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았다.
I. 죄의 문제, 혹은 양심의 가책에 관하여
내가 봐도 곰팡내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다. 여기서 원죄에 관한 논의나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죄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절대론적 윤리설은 이미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고정불변의 절대적 도덕 원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게 개인이 양심에 따라 내리는 판단이다.
이로써 개인은 세계의 입법자요, 가치의 창조자가 되었다. 자기 행위의 기준은 자기가 세운다. 신의 계명대로, 부모의 말대로, 전통과 관습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난, 모든 가치의 전도!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의 행복을 위한 체계를 스스로 세운다. 신은 죽었다! 이제는 인간이 신을 대신한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체계조차, 자기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조차 인간은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이라 여기면서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데도,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짓인데도 자기도 모르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신이 죽었다고 죄까지 죽는 것은 아니다.
신의 죽음이라는 복음을 전해준 니체는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대답하는가? ‘진정한 강자는 자신의 도덕을 방어한다. 도덕은 자기 자신의 강함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원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면, 너는 너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자기 세계를 완벽히 방어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그 세계를 바꾸기도 원치 않는다면? ‘계속 도전하라!’ 그래도 안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잘났다, 그래 너 루저다!’
자신의 가치관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더욱더 선과 도덕(자신이 만든 것일지라도!)을 추구할수록 죄의식은 더욱더 깊어진다. 선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엄격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행동해도 모든 영역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벗을 수 없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II. 용서의 문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죄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뿐이다. 내가 깡패에게 맞았는데 지나던 사람이 갑자기 깡패에게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라고 말한다면, 나나 깡패나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 당사자, 혹은 최소한 그를 대표?대리한다고 인정될만한 사람뿐이다.
여기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발생한다. 이건 아주 악질의 죄를 지었다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다. 용서해줄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때로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피해자가 소멸하거나 상실된 경우이다.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살아있더라도 연락이 끊어졌거나, 소재를 모르거나, 심지어는 알고 있고 매일 만나더라도 대화할 수 없는 경우, 혹은 집단이나 공동체에 대한 잘못을 범했으나 그 집단이 해체된 경우, 나를 용서해줄 사람은 사라진다.
둘째는 자신의 신념에 반한 죄의 경우. 이때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뉘우칠 뿐 나를 용서해줄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남들이 ‘뭐 그런 것 갖고 괴로워하느냐’하고 아무리 얘기해줘야 소용없다. 그게 잘못임을 나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가해자로서이지 피해자로서가 아니므로, 나를 용서할 자격은 없다.
죄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견딜 수 없다. 그에게는 그의 죄를 용서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이로써 신은 존재한다기보다는 요청된다.
그리고 이 ‘죄’와 ‘용서’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는 내가 알기로는 기독교뿐이다.
III. 구원의 문제 - 용서의 원리에 관하여
이에 관해 정통 기독교 교리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였으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기서 온갖 의문부호가 파생된다. 신은 있는가? 그 신은 아들이 있는가? 예수가 정말 신의 아들인가? 그는 정말 부활했는가? 신의 아들이 죽었다 부활한 것과 내 죄의 용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모든 물음에 답하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 7:4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7~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결핍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결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알았고, 그것을 고쳐줄 치유를, 은혜를, 용서를, 자비를 갈구하였다. 진리와 정의의 추구,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한계의 자각, 이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이었다. 아니, 구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죄의 인식이 곧 속죄인 것이다!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0~41)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의인이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죄인이다. 의인이면서도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의인에게 그가 의인임을 일깨워주기에 이 소식은 기쁜 소식, 복음인 것이다.
물론 이 소식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하다. 복음은 확실히 그들의 죄의식을 덜어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용서와 속죄의 소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스스로 건강하다 여기는 자들에게 복음은 필요없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완벽한 인간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스스로 의인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터무니없이 낮은 도덕적 기준 때문이거나, 잘해봐야 자기 기만과 자기 합리화, 위선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IV. 실천의 문제 - 신의 뜻에 관하여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속죄가 가능하다고 해도 범죄 후의 죄책감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괴로워함으로써 용서받은 사람이 그 괴로움을 반복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그리고 예전 나의 비판은 이 지점에 집중됐었다. ‘이것이 옳은 일 - 신의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은 모두 자기 뜻대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성경은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행위의 기준이 행위 이후에 마련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상, 철학, 정책, 사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생각이 옳은지는 실천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금리를 인하하면 경기가 회복될지, 두발 자유화를 실시하면 청소년 범죄가 늘어날지, 총파업을 벌이면 노동법이 개정될지, 이 모든 것들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그 방안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평가될 뿐이다. 물론 평가는 ‘올바른 방안이어서 성공했다’라고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공했기 때문에 올바른 방안이 되는 것이다.
각 영역에 있어서 사람들은 나름의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판단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달라진다. 도덕적 판단도 마찬가지다. 양심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해 판단해도 결론은 다를 수 있다. 이 때 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과 싸움은 유보하고, 각자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성경의 권고이다.
한 사람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들이 똑같다고 여긴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요하게 여기고, 고기를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그렇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그러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네가 어째서 네 형제를 판단하는가? 왜 네 형제를 업신여기는가?...우리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자...네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켜라...신념을 갖지 않고 하는 모든 행동이 죄이다(Everything that does not come from faith is sin).(롬 14장 발췌, NIV를 참고로 필자가 수정)
무엇이 선인가, 진리인가, 신의 뜻인가에 대한 경직된 태도는 교조주의와 위선을 낳는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가 좋은 예이다. 결론나지 않을 문제로 서로 자기 주장을 강변할 것이 아니라, 각자 최선의 길을 찾아가며,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그 세계로서 타인을 설득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흔히 비타협적 근본주의자의 온상으로 생각되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야말로, 오히려 다원주의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V. 에필로그 - 생각해 볼 문제들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을 해두고도 ‘중간’ 보고서라 이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 때문이다.
우선 예수의 신성, 내지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물론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초자연적 존재, 천지창조, 기적, 내세와 같은 개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이다.
신이 두려워서, 지옥이 두려워서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확실히 노예적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초보적 단계의 인류를 위한 은유나 유추로만 이해하기에는 성경에는 기적과 내세에 관한 언급이 너무 많다. 실제로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신의 존재를 믿는 것만큼이나, 믿지 않는 것도 일종의 신앙에 속한다. 필요한 것은 결단인지도 모른다.
둘째로 이상의 내용은 주류 한국 교회의 교리와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얘기를 지껄이다간 당장 이단으로 쫓겨날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건 사실상 무신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양심과 실천이 중요한 거라면,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굳이 신을 상정하는 이유는 있다. 나는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나는 의인이다(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므로). 이건 결국 내가 나를 의인이라고 하는 꼴이다. 상당히 낯간지러운 일이다. 자기합리화라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대신해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비록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무릎꿇고 눈물을 쏟으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참회하고 괴로워하는 정도는 아니라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실천’이겠지만..
끝으로, 이제까지 쓴 글은, 다른 내 글이 언제나 그랬듯이 별로 새로운 내용도 아니고 완전한 나의 창작도 아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서울 모 교회에 다니는 나의 친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III.에서 다룬 내용은 그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C. S. 루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니, 그의 생각도 이 글에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혹시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 생각해 볼 문제
(생각이 끝나면 또 글 올려보겠습니다)
1.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은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고유한 특색인가, 아니면 모든 인류의 공통된 문제인가? 기독교 전래 이전의 동양 문헌들을 바탕으로 탐구해 보자.
2. 성경의 기록들에 대하여 얼마나 역사성 혹은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성서고고학, 비교종교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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