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9일에 썼던 글입니다.)
예전부터 들어왔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죽음을 앞둔 늙은 부엉이가 아니고서야 세계를 관찰만 할 수 있느냐고.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듯한 지인들의 호소를 뒤로하고, 그러나 나는 오늘 대추리에 대한 해석자로 남으려 한다.
공권력의 권위, 법과 질서, 그 천박함
물론 나는 '공권력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둥,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처해야 한다'는둥의 악의적인 선동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공권력의 집행은 항상 정당한가? 법은 항상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고 믿으면 편리하기야 하겠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망각한 천박함을 드러낼 뿐이다. 정부 당국자야 자기들 권력을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이해하겠지만, 언론, 나아가 평범한 시민들까지 그런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은 절망을 넘어 무서운 일이다.
민주국가에서 공권력과 법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은 그것이 민주적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정, 운영, 개정 등의 전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운영 절차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원리는 대립하는 입장이 있을 때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반발하는 주민들과 어떤 대화의 노력을 했는가. 요식적 설명회 개최와 계고장 발송 이외에 진지한 설득의 노력을 했는가. 이미 두 번이나 미군 기지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경험이 있는 주민들의 정서는 고려했는가. '모든 가능성을 열고 대화한다'는 말이 채 귓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대규모 군경을 투입하여 유혈진압한 것은 어느 나라 정부의 도덕성인가.
민주화 2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천박했다. 그래서 나는 절망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없다
대추리 주민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못 나가겠다는 것이다. 살던 곳에서 계속 농사 짓겠다는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주민들이 사비를 모아 세우고 국가에 기증한 학교가 하루아침에 그 국가에 의해 헐려버리다니, 바다를 메우고 황무지를 개간해 기름진 농토를 만들어 놨더니 통째로 미군에 넘겨줘야 한다니, 그것도 당하던 사람만 계속 당해야 한다니,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주민들과 국방부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주민들은 계속 농사를 짓기 원하고, 국방부는 토지를 수용해 미군 기지로 제공하고자 한다. 절충이 불가능하다! 가장 가능한 방안이 보상금과 이주비를 지원하고 토지를 수용하는 것이겠지만, 현재 주민들의 입장은 '백억을 줘도 못 나간다'이다. 무슨 타협이 가능하겠는가.
다른 방안은 없을까. 대추리 대신 다른 지역을 미군 기지로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추리만큼의 미군기지 면적을 축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미국과의 재협상을 전제로 한다. 재협상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재협상을 한다 해도 미국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다 떠나서, 정부에 그런 의지가 있을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혀 가능한 옵션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하긴, 이미 합의한 약속을 어기는 것은 국가신인도에 치명적인 손상이 될테니. 오해 마시길. 상대가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조약은 원래 지켜야 하는 거다. 국내 상황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력이든 정치력이든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 뿐이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정부의 비민주성을 비난하면서도, '대화와 타협에 의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지 못하겠다.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주민들이 보상금이라도 받고 떠나기로 한다 해도, 그건 비난 여론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생존권, 전략적 유연성, 혹은 반미
한미동맹 자체를 의문시하는 급진파도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파기한다고 '자주국가'가 될까.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중국이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이 외세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 19세기 이후 또다시 오는 것이다. 아직 중국이 여기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19세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일이다. 물론 한미동맹을 공고히 한다고 우리의 발언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맹 파기가 대안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당장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군 철수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분히 레토릭이라고 이해한다. 진짜로 지금 당장 미군이 모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 없는 한반도를 위한 준비는 해나갈지언정, 지금 당장 철수는 무리이다.
일단 미군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기지 이전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전략적 유연성 확대의 일환인 것이 맞긴 하지만, 미국은 그런 형태가 아니면 미군을 주둔시키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합의한 것으로, 돌이키기도 쉽지 않다.
이 세 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대추리 주민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이건 국가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매번 반복되어 면목 없긴 하지만 또다시 대추리 주민들이 희생해줘야 할 일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비극.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만일 정부가 처음부터 성의있는 자세로 주민들과 교섭을 시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주민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정부 방침을 이해하며 고향을 떠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고, 상황을 되돌리기에 양측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대통령으로부터 '엄정대처' 주문까지 받은 정부는 '21세기 최대의 공안사건'이라는 이번 사태를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할 것이고, 수많은 활동가가 줄줄이 연행될 것이다. 주민들은 결국 쫓겨날 것이고, 언제 논이었느냐는 듯 미군기지는 들어설 것이다. 보수 언론은 국가 기강의 확립을 보며 박수칠 것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반미분자들이 소탕됐다며 안도할 것이다. 역사는 이 사태를 노무현 정권의 비민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할 것이고, 나는 이 정권을 향해 또 하나의 환멸을 쌓을 것이다. 모두가 정답을 안다.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공권력의 권위, 법과 질서, 그 천박함
물론 나는 '공권력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둥,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처해야 한다'는둥의 악의적인 선동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공권력의 집행은 항상 정당한가? 법은 항상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고 믿으면 편리하기야 하겠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망각한 천박함을 드러낼 뿐이다. 정부 당국자야 자기들 권력을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이해하겠지만, 언론, 나아가 평범한 시민들까지 그런 식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은 절망을 넘어 무서운 일이다.
민주국가에서 공권력과 법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은 그것이 민주적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정, 운영, 개정 등의 전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운영 절차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원리는 대립하는 입장이 있을 때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반발하는 주민들과 어떤 대화의 노력을 했는가. 요식적 설명회 개최와 계고장 발송 이외에 진지한 설득의 노력을 했는가. 이미 두 번이나 미군 기지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경험이 있는 주민들의 정서는 고려했는가. '모든 가능성을 열고 대화한다'는 말이 채 귓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대규모 군경을 투입하여 유혈진압한 것은 어느 나라 정부의 도덕성인가.
민주화 2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천박했다. 그래서 나는 절망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없다
대추리 주민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못 나가겠다는 것이다. 살던 곳에서 계속 농사 짓겠다는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주민들이 사비를 모아 세우고 국가에 기증한 학교가 하루아침에 그 국가에 의해 헐려버리다니, 바다를 메우고 황무지를 개간해 기름진 농토를 만들어 놨더니 통째로 미군에 넘겨줘야 한다니, 그것도 당하던 사람만 계속 당해야 한다니,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주민들과 국방부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주민들은 계속 농사를 짓기 원하고, 국방부는 토지를 수용해 미군 기지로 제공하고자 한다. 절충이 불가능하다! 가장 가능한 방안이 보상금과 이주비를 지원하고 토지를 수용하는 것이겠지만, 현재 주민들의 입장은 '백억을 줘도 못 나간다'이다. 무슨 타협이 가능하겠는가.
다른 방안은 없을까. 대추리 대신 다른 지역을 미군 기지로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추리만큼의 미군기지 면적을 축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미국과의 재협상을 전제로 한다. 재협상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재협상을 한다 해도 미국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다 떠나서, 정부에 그런 의지가 있을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혀 가능한 옵션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하긴, 이미 합의한 약속을 어기는 것은 국가신인도에 치명적인 손상이 될테니. 오해 마시길. 상대가 미국이라서가 아니라, 조약은 원래 지켜야 하는 거다. 국내 상황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력이든 정치력이든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 뿐이고,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정부의 비민주성을 비난하면서도, '대화와 타협에 의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지 못하겠다.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주민들이 보상금이라도 받고 떠나기로 한다 해도, 그건 비난 여론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생존권, 전략적 유연성, 혹은 반미
한미동맹 자체를 의문시하는 급진파도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파기한다고 '자주국가'가 될까.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중국이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이 외세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 19세기 이후 또다시 오는 것이다. 아직 중국이 여기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19세기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일이다. 물론 한미동맹을 공고히 한다고 우리의 발언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맹 파기가 대안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당장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군 철수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분히 레토릭이라고 이해한다. 진짜로 지금 당장 미군이 모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 없는 한반도를 위한 준비는 해나갈지언정, 지금 당장 철수는 무리이다.
일단 미군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기지 이전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전략적 유연성 확대의 일환인 것이 맞긴 하지만, 미국은 그런 형태가 아니면 미군을 주둔시키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미 합의한 것으로, 돌이키기도 쉽지 않다.
이 세 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면, 대추리 주민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이건 국가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매번 반복되어 면목 없긴 하지만 또다시 대추리 주민들이 희생해줘야 할 일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비극.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만일 정부가 처음부터 성의있는 자세로 주민들과 교섭을 시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주민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정부 방침을 이해하며 고향을 떠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고, 상황을 되돌리기에 양측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대통령으로부터 '엄정대처' 주문까지 받은 정부는 '21세기 최대의 공안사건'이라는 이번 사태를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할 것이고, 수많은 활동가가 줄줄이 연행될 것이다. 주민들은 결국 쫓겨날 것이고, 언제 논이었느냐는 듯 미군기지는 들어설 것이다. 보수 언론은 국가 기강의 확립을 보며 박수칠 것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반미분자들이 소탕됐다며 안도할 것이다. 역사는 이 사태를 노무현 정권의 비민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할 것이고, 나는 이 정권을 향해 또 하나의 환멸을 쌓을 것이다. 모두가 정답을 안다.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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