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기장2011. 8. 30. 21:34
(2007년 12월 19일에 썼던 글입니다.)


작정하고 우리가 몰랐던 일들을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일러두기'를 보자. '1. 이 책은 일제 강점기 신문과 잡지에서 10여 차례 이상 보도된 사건 가운데 역사책에서 한 줄 이상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엮은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들 사건이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하긴 통사에 적기는 너무 세세한 이야기들이다), 책장을 넘겨보면 역사책에 없다고 무가치한 것은 아님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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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순사의 살해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사형당할 뻔한 시골의 조선 청년들은 한 변호사의 논리적인 변호로 무죄 석방된다. 아, 일제 시대에도 나름대로 사법제도가 작동하고 있었군, 이런 교훈은 그러나 다음 에피소드에서 바로 사라진다. 조선인 하녀를 살해한 강한 혐의를 받는 일본인 여성은 검찰의 허술한(?) 기소로 무죄 판결을 받아, 결국 주범은 자유를 누리는데 종범만 처벌 받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게 쉽게 어떤 시대였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일제 시대였던 것이다.

친일을 대가로 작위를 얻은 조선인 귀족들의 행각도 씁쓸하다. 일제로부터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이르는 포상금을 받은 그들이지만, 1930년대까지 그 재산을 유지한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사치와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총독부를 드나들며 생활비를 요구했으니 깡통만 안 찼지 거지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저자 전봉관 교수는 조상들의 땅을 찾으려 소송을 제기하는 친일파의 후손들에게 '그 재산은 조상들이 이미 들어먹었는데 무슨 재산을 찾으려 하는가'하고 일갈한다. (물론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법이 제정된 지금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는 어려워졌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건 시대를 잘못 타고난 한 여성의 이야기. 최영숙이라는 이 여인은 20살에 이미 영어와 독일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21살에는 혼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스웨덴에 유학했다. 무려 1926년의 일이다. 6개월만에 스웨덴어를 공부해 스톡홀름대학에 입학, 아시아에 관심이 많던 아돌프 황태자의 자료 정리를 도와줄 정도로 스웨덴 지식인계의 핵심에 자리를 잡았다.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가 스웨덴에 남았다면 편안한 생활이 보장돼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5개국어를 구사하는 그녀를 그러나 조선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며 '콩나물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뜨거운 관심이 쏟아진 것은 27살을 끝으로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어째서 그녀가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를 궁금해했을 따름이었다.

수록된 에피소드들은 '재미있다'고 적기에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저자의 필치는 날렵하고, 논문같은 딱딱한 형식을 피해 술술 풀어가니 겁먹을 필요 없이 집어들 수 있다. 다만 에피소드마다 덧붙인 저자의 권선징악적 논평은 굳이 붙일 필요가 있었나 싶다. 이야기의 여운이 깨져버린다. 하지만 100년 전의 신문과 잡지를 뒤적거려 귀한 이야기를 발굴해낸 저자의 작업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여름에 저자의 신간(럭키경성)이 이미 나왔지만, 벌써 또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