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3. 5. 23. 00:00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오름, 2007)의 저자 송종환은 1970년대 남북 회담에 직접 참가하고,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협상 전문가라는 이름이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를 '협상 무용론'으로 요약하면 저자는 조금 억울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저자의 분석을 따르자면 남북 협상은 현 단계에선 필요가 없다는 게 논리적 결론이 될 듯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 전제는 '북한의 목표는 적화통일이고, 이건 북한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남북 대화 초기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협상이 진행되면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 등 자신들의 주장을 고집한다. 양측의 주장이 맞서 교착상태에 빠지면 어떤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용어를 써서 합의문을 작성하고, 이후 합의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건 남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고, 그러면 북한은 남한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책임을 떠넘기며 대화 중단을 선언한다. 그 동안의 남북 대화는 이런 패턴을 보여왔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책은 2000년 6.15 선언 직후 나왔지만(2007년 증보판 발간), 최근 개성공단 사태의 진행을 보면 김정은 체제 하에서도 북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은 개성공단 가동 중단 책임을 (미국이라는 외세와 합세한) 남한의 적대 정책에 돌리고 있으며, 개성공단과 관계 없는 '근본 문제 해결'(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할 듯)을 개성공단 재가동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석이 맞다면 사실상 북한과는 협상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북한이 적화통일 목표를 버리지 않는 한, 북한이 협상에서 내놓은 어떤 제안도 진정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협상 무용론을 주장하진 않는다. 어찌 됐건 우리에게 가능한 대안은 무력 통일, 현상유지, 대화와 협상 세 가지 뿐인데, 전쟁을 할 순 없고 영원히 분단국가로 남아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이런 인식의 협상론은 최선의 전략이라기보단 기껏해야 최악을 피한 것 뿐이다북한의 목표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협상해야 할까? 저자는 경제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할 수 있다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군사적 긴장 완화를 먼저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핵,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대규모 대북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사회 교류도 균형있게 지속하되, 엄격한 상호주의 원칙을 지킬 것도 요구한다.


원론적으로는 맞지만, 그래서 '어떻게' 협상을 할 수 있냐는 물음엔 여전히 답이 되지 않는다. 군사적 긴장 완화에 관해서는 이미 20여년 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완벽한 규정을 합의했다. 다만 북한이 이행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됐다. 협상을 해야 북한이 변하는데, 북한이 변하지 않는 한 협상은 안 된다. 동어반복일 뿐이다. 


핵 문제 해결 전까지 대화는 없다는 주장도 지난 MB정부 5년 간 이미 철저히 실행됐다. 그 동안 북한은 핵실험을 한 번 더하고 장거리 로켓도 만들었다.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셈이다.


햇볕정책 지지자를 북한의 민족공조 주장에 동조하는 낭만적 민족주의자로 치부하는 것도 저자의 한계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일부 주사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평범한 진보진영 인사들은 대부분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북 강경책은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북한의 전략은 변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역으로 우리는 어떨까? 북한의 체제 변화와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이라는 목표를 버린 적이 있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부터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개성공단도 대북 지원도 남북 대화도 모두 북한의 체제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북한이 모를 리가 없고,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는 합의문을 북한이 지킬 이유가 없다.


어쩌면 우린 북한의 체제변화라는 가능성을 너무 순진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을 갖는 거의 유일한 이유는 북한의 경제난이다.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720~1000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빈국이긴 하지만, 북한보다 못 사는 나라는 아프리카에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토고를 보자. 토고의 국민소득은 570달러에 불과하지만 에야데마 대통령은 38년 동안 장기집권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줬다. 독재자는 인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필요가 없다. 자기 부하들을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돈만 있으면 권력을 유지하기 충분하다. 쿠바는 50여 년 동안 미국의 경제봉쇄를 당했지만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라크 정권이 무너진 것도 경제제재가 아니라 미국의 침공 때문이었다.


남북 관계에서 현상유지에 만족해야 하는 시기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최대 목표도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 정도일 것이다. 사실 남북 관계가 한중, 한일 관계와 비슷한 정도로만 된다고 해도 엄청난 발전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공존해야만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 조차도 남북이 여러 번 합의했으면서 거듭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