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8. 30. 21:27
(2006년 10월 7일에 썼던 글입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안용복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본에 두 번이나 건너가 막부와 담판을 벌이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임을 인정하는 서계를 받아왔다.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개인으로 해낸 이 영웅의 이야기는 그러나 포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관직 사칭과 불법 출국 혐의로 처벌받는 반전을 겪으며 막을 내린다. 그리고 애국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선 정부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후일담처럼 따라붙는다.

비극적으로 끝난 영웅의 행적이고,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의문나는 점이 많다. 일본 정부는 얼마나 허술했기에 몇 달이 지나도록 ‘정식 관리’와 ‘관리를 사칭한 민간인’도 구분하지 못했을까? 안용복이 일본에 간 것은 두 번인데, 처음은 어민으로 연행됐고, 다음은 정3품 당상관을 자칭했다. 3년만에 평민이 정3품 벼슬아치가 됐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당시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는 쓰시마 번을 통해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기존의 외교 관례를 깨고 돗토리 번에 별안간 나타난 안용복에 대해 막부는 조선 정부에 신원 조회같은 것도 요청하지 않았을까? 조선 정부는 아무리 고지식하기로서니 영토를 되찾아온 영웅에게 포상은 커녕 귀양살이로 보답할 정도로 무능했단 말일까?

우리가 접하는 안용복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서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는 안용복이 죄인의 신분으로 비변사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했던 진술을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말이니 약간의 과장이 없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일본 측에서는 죄인의 심문 기록이라는 이유로 ‘안용복 사건’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도 있다. 물론 그런 시각은 일본측 사료로도 부정되는 것이지만, 우리도 일본측 사료를 함께 보며 안용복에 대해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조·일 양국에 걸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독도본부 홈페이지(www.dokdocenter.org)에 정리된 안용복의 대일담판 (이하 ‘담판’)을 일본측 연구 성과와 비교해보겠다.

일본으로 연행된 안용복

1618년(1622년이라는 설도 있다)부터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당시 일본명 다케시마. 독도는 마쯔시마라고 불렀다) 도해면허를 받아 어업활동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대로다. 문제는 1693년 3월에 일본 어민이 조선 어민 두 사람을 붙잡아 일본으로 데려오면서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작년에도 조선 어민 때문에 조업을 못했고, 매년 이런 식이라면 큰 손해를 볼 것이었다. ‘담판’의 내용은 이렇다.

1693년 봄에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울산 지방 어부들과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의 어부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싸움이 커지자 일본 어부들은 꾀를 냈다. 조선 어부들에게 평화적으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대표를 보내라고 제의한 뒤, 막상 조선어부들이 안용복과 박어둔 두 어부를 대표로 뽑아 보내자 그 두 대표를 호오키 주의 섬 오키시마로 납치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기록에는 싸움이라 할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적었을 리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국 기록도 자세한 내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거가 되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숙종20년 2월 23일조이지만, 실록이 묘사하는 당시 상황은 ‘왜인의 배가 안용복·박어둔 2인을 꾀어내 잡아가버렸다’가 전부이다. 싸움이나 대표 등의 이야기는 윤색해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일본 오키 섬에 도착한 것은 3월 20일이었다. ‘담판’의 기록은 이어진다.

이때, 안용복은 우선 오키시마의 도주에게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 고기잡이를 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너희가 우리를 잡아 왔느냐"고 당당히 따졌다. 안용복의 논리정연한 항의를 받은 오키시마의 도주는 어쩔 수가 없어 자신의 상관인 호오키 주 태수에게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을 넘겼다. 안용복은 이 자리에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이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강조하고 남의 땅에 들어와 불법적으로 조업하는 일본 어부들을 단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오키 섬에서 안용복 일행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일본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오키 섬 번소에서 진술서를 작성했으며, 일본 어민들은 진술서에 서명을 강하게 거절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울릉도가 조선땅이라는 주장을 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는 있지만, 오키 도주를 만났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오키 섬은 당시 호오키 번의 소속도 아니었다. 오키 섬은 마쯔에 번의 영지였다. 따라서 ‘오키 도주가 어쩔 수가 없어 자신의 상관인 호오키 주 태수에게 넘겼다’는 내용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다시 ‘담판’의 내용이다.

그때 호오키 주의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용복을 후대해 주었고, 자신의 상급 기관인 에도 막부에 처리를 맡기기 위해 에도로 보낼 때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닌 만큼 선처해 줄 것을 건의 한다"는 취지의 문서를 함께 올렸다. 에도 막부의 최고 책임자인 쇼군은 그 건의를 받아 들여 "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본 어민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만들어 주고 안용복을 석방하여 조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에도에 보내지지 않았다. 안용복 일행은 3월 27일에 오키 섬에서 요나고 마을로 옮겨졌는데, 이는 그들을 연행해 온 일본 어민들이 요나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행적을 추적하면 요나고에 그대로 두 달간 억류돼있다가 6월 1일에 돗토리 번의 성하(조카마치, 城下町)에 도착해 1주일간 머물다가 6월 7일 출발, 같은달 30일에 나가사키에 도착, 쓰시마 번의 관계자에게 다시 조사를 받은 후 8월 14일 나가사키를 떠나 9월 3일 쓰시마에 도착해 이후 조선으로 송환된다. 에도에 가지 못한 것은 물론, 쇼군을 만나 서계를 받는 일 따위는 생각할 수 없다.

호오키 주 태수를 만났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요나고의 영수가 안용복을 조사한 일은 있다. 하지만 호오키 주 태수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고, 돗토리 번주의 경우는 아예 참근교대제 때문에 에도에 있던 상황이므로 안용복을 만날 수 없었다(일본사에 어두워 호오키 주와 돗토리 번의 관계를 잘 모르겠는데,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둘이 같은 것으로 기술하는 문서도 많지만 확실한지 모르겠습니다). 안용복의 진술서가 에도로 보내지긴 하지만, 호오키 주 태수가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니 선처를 바란다’는 문서를 올린 사실은 더더욱 없다. 돗토리 번에서 울릉도가 일본령이 아님을 확인하는 글을 올리는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막부 역시 이 때 울릉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후 도해금지령이 내려지지만 그것도 3년 뒤의 일이다. 오히려 안용복이 처음 왔을 때 도쿠가와 막부의 방침은 ‘조선인에게 이후 다케시마로 건너오는 일이 없도록 재차 납득시키고 나가사키로 송환한다’는 것이었다.

요나고에 머무는 동안 안용복 일행은 외출도 허락되지 않고 두 경비원의 감시를 받으며 일본 어민의 집에 구치돼있었다. 돗토리 번으로 옮겨지지만 그것은 나가사키로 호송하기 위함이었고, 막부의 지시가 내려온 이상 다케시마를 침범한 범죄자에게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인정하는 서계를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에도 막부가 어떻게 조선 조정의 대표가 아닌 한낱 민간인에게 서계와 같은 외교문서를 만들어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에도 막부가 서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안용복이 뒷날 조선 조정으로부터 엄격한 조사를 받을 때 한 말이었으므로 그것은 안용복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 조선 조정의 영중추부사라는 정일품무관 벼슬에 있던 남구만도 사실로 인정한 기록으로 미루어 안용복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할 수 있다.

그때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병들어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화해를 성립시키고 국교를 수립시킴으로써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더욱 굳히고 조선을 통해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했던 만큼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 문제를 놓고 조선과 불과를 빚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에서"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는 서계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담판’)

안용복이 받았다는 서계는 그의 말에 의하면 쓰시마 도주에게 빼앗겨 현재 전하는 것이 없다. 유일한 증거는 비변사에서 심문받으며 안용복이 진술한 것 뿐이다.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사실로 인정했다고 하지만, 이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이제 안용복이 다시 백기주에 가서 정문(呈文)한 것을 보면 전의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숙종 22년 10월 13일조)’임을 보면 남구만도 정황상 추측할 뿐이지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조선과 일본은 이미 1607년에 강화하고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통신사도 왕래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숙종 대에도 통신사가 한 차례 갔다 왔고, 왜관이 개설됐다. 특별히 막부가 조선과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야 했던 시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뒤이어 쓰시마 번을 통해 다케시마 귀속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를 점유하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즉 이상의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에도에 간 적이 없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일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의 다케시마 출입 금지’를 방침으로 정하고 조선과 교섭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전쟁, 1라운드

막부의 명을 받은 쓰시마 번은 조선 정부에 공문을 발송한다. 1693년 9월의 일이다.

‘귀국 해변의 어민이 작년에 우리의 다케시마에서 몰래 어렵을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또다시 어민 40여명이 다케시마에서 고기를 잡았으니 이 때문에 어민 두 사람을 구류했습니다...이후로는 그 섬에 오는 어선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엄히 금지시키기 바랍니다.’

‘담판’은 이것을 막부의 방침을 거스른 쓰시마 번의 단독 행동으로 본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진술이 근거이다. 하지만 에도에 간 적이 없는 안용복이 막부의 방침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쓰시마 번은 울릉도 귀속문제로 3년간 조선과 교섭한 후 그 결과를 에도 막부에 보고했다. 안용복이나 조선이 어떻게 인식했는가와는 별개로 쓰시마 번이 이런 엄청난 일을 단독으로 꾸몄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조선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3백년간 비워둔 땅으로 인해 화가 생기고 우호를 잃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낸다.

‘우리는 도해를 지극히 엄하게 금지하고 있어, 비록 우리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물며 귀국의 다케시마이겠습니까.’

당국자들은 묘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두 나라가 섬의 이름을 다르게 쓰는 것을 이용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케시마가 울릉도라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록 편찬자도 후에 ‘신중함이 지나쳐 이웃나라에 약점을 보였으니 애석한 일’이라 논평하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를 독점하려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울릉도’라는 문구가 매우 걸리적거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쓰시마 번의 사자는 ‘울릉도’라는 문구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하며 공문 접수를 거부한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두 이름을 같이 쓰는 것이야말로 이 답서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삭제할 수 없다며 버틴다. 쓰시마 번의 사자는 이듬해(1694년) 6월까지 버티다가 돌아간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전쟁, 2라운드

그동안 조선에서는 정변이 일어난다. 뒤에 영조의 생모가 되는 숙원 최씨의 독살설이 폭로된 것이다. 1694년 4월 숙종은 집권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을 등용한다. 갑술환국이었다. 삼정승도 모두 교체되었다. 한국의 일부 안용복 관계 기사에서는 이를 두고 마치 대일본 유화정책에 대한 반발과 문책이 환국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외교 문제는 환국과 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환국으로 울릉도 문제에 대해 조정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분명했다. 부산에 파견된 접위관 유집일은 안용복을 만나 이 문제에 관해 묻는데, 안용복은 ‘울릉도를 점거하려는 것은 쓰시마 번주의 사견이지 막부의 방침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의 공문을 취소하고 새로운 공문을 발송한다.

‘우리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울릉도란 섬이 있습니다...이번에 우리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의외로 귀국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에도까지 잡아갔습니다...귀국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사단을 야기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문구를 고치려다 오히려 조선인 납치의 책임까지 추궁받게 된 것이었다. 쓰시마 번의 사자는 당연히 공문 접수를 거부하며 버티다가 돌아가고 1695년 봄에 조선 조정에 항의문을 발송한다. 조선은 다시 반론을 보내지만 쓰시마 번은 납득하지 못하고 양국의 교섭은 일단 결렬된다.

다케시마 도해금지령

1695년 10월에 쓰시마 번주는 조선과의 교섭 과정을 보고하러 에도 막부에 입조한다.

‘조선이 완강하게 다케시마를 자신의 땅이라 하며 우리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막부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로 하고 1695년 12월 24일에 돗토리 번에 7개 항의 질문서를 보낸다. ‘다케시마는 언제부터 돗토리 번에 부속한 것인가’가 그 첫 항이었다. 다음날 도착한 돗토리 번의 답변은 이러했다.

‘다케시마는 돗토리 번에 부속하지 않습니다.’

결국 1696년 1월 28일 막부는 다음과 같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전달한다.

‘다케시마의 지리를 헤아려보니 이나바와의 거리는 160리 정도이고 조선과의 거리는 40리 정도이다. 이것은 일찍이 그것이 그들의 땅이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을 것 같다...당초 저 나라에서 빼앗은 것이 아니니, 지금 또 돌려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로지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해야 할 뿐이다.’

이를 ‘담판’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1696년1월에 종의방이 에도 막부를 방문했을 때에도 막부의 쇼군은 호오키 주 태수를 포함해 네 명의 태수들이 나란히 앉은자리에서 다케시마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하여 토론이 계속됐는데, 결론은 다케시마, 곧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 결론은 물론 쇼군이 유도한 것이었다.

우선 쓰시마 도주의 입조 시기가 틀렸다. 또한 일본측 기록에서는 쓰시마 번과 막부의 대립이나 엇박자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쇼군이 울릉도 문제를 해결했다기 보다는 돗토리 번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3품 당상관 안용복

그리고 안용복은 다시 일본에 건너간다. 1696년 5월의 일이다. 아래는 ‘담판’의 기록이다.

마침 일본 어선 다섯 척이 조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용복은 일본 어선의 뱃머리로 달려가 "울릉도는 원래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어찌 침입했느냐"라고 호령했다. 일본 어부들은 "우리는 본래 마츠시마에 사는 어부들로 고기를 잡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곧 돌아가겠다"라고 대답했다. 안용복은 다시 "너희가 마츠시마라고 부르는 그 섬은 곧 우산도이며, 그 섬 또한 우리 땅인데 너희가 어찌 감히 거기에 산다고 하느냐"고 꾸짖었다.

안용복의 기세에 놀라 일본 어부들은 모두 도망쳤다. 안용복은 자신의 어부들을 이끌고 일본 어부들이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으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가 몽등이로 그것들을 마구 두들겨 부수자 일본 어부들은 배를 타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안용복이 말한 우산도가 오늘날의 독도임을 물론이다.

일본측에서는 1월에 이미 도해금지령이 내려졌으니 일본 어선이 울릉도에 가지 않았는데 울릉도에서 일본 어민을 보고 항의하러 오키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금지령이 돗토리 번에 전달된 것은 8월이고 조선에 통고된 것은 10월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해에 일본 어민이 울릉도에 출어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은 ‘우산도’가 아니라 ‘자산도’라고 말했다.

안용복은 다시 일본 어부들을 오키시마까지 쫓아갔다. 그는 섬에 상륙하자마자 도주를 만나 "몇 해 앞서 내가 여기 왔을 때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 땅이라는 서계를 받았는데, 일본 어부들이 또 다시 우리의 경지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고 항의했다. 이에 오키시마의 도주는 자신의 상관인 호오키 주 태수에게 알려 대답을 받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날짜가 꽤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안용복은 호오키 주 태수와 직접 담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호오키 주로 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할 일은 그들 가운데 이인성이라는 문사를 포함 시켰다는 사실이다. 안용복은 호오키 주 태수와 담판하고 그 내용을 문서로 남기려면 유능한 문사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인성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사실만 보아도 안용복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일을 추진했는지 깨닫게 된다. 뒷날 안용복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 죄인", 곧 범경죄인으로 몰려 심문을 받았을 때, "제가 분을 참지 못해 배를 타고 곧장 호오키 주로 가서 울릉우산양도감세라고 참칭한 뒤, 저는 남빛 철릭을 입고 검은 포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탔으며 다른 동행인들은 모두 말을 탄 채 태수의 공청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빛 철릭이라면 정3품 당상관 이상이라야 입을 수 있는 조선 시대 무관의 옷이다. 안용복은 관명을 사칭하고 거기에 걸맞은 관복까지 입음으로써 갔다. 호오키 주 태수와 대등한 지위에 서서 당당히 담판하려고 했던 것이 확실하다.(‘담판’)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검은 갓을 쓰고 연두색 상의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통정대부’라 쓴 패를 차고 있었다 한다. 오키의 역인이 안용복을 조사했고, 그는 4년전 일본에 연행됐던 것을 말한 후, ‘조선팔도지도’를 꺼내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도주를 만났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안용복은 오키에서 전에 일본에서 받았다는 물건들과 기록 장부를 꺼냈다는 것이다.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진술할 때는 처음 일본에서 받은 물건들은 쓰시마 도주에게 빼앗겼다고 하고 있다. 그 물건들을 어떻게 3년 후에 다시 꺼낼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또 일본은 외국 배가 도착했을 때 배 안의 물품을 모두 조사해 목록으로 만들도록 돼있지만, 당시 안용복이 타고 온 배를 조사한 기록에는 남빛 철릭이나 가죽신 같은 물품은 없다.

다만 정3품 당상관을 칭한 것은 사실이며, 울릉도의 소속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온 것도 확실하다. 일행은 오키를 떠나 6월 4일 호우키에 도착한다. 일본에서는 유학자를 파견해 필담을 나눴지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일본에 온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 안용복 일행이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써주었던 것, 또 안용복이 통역 출신이며 3년 전에도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연행됐던 점을 생각하면 이번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돗토리 번에서 안용복 일행의 활동은 어땠을까. ‘담판’의 기록이다.

호오키 주 태수의 공청에서 태수와 마주앉은 안용복은 그 자신이 3년 전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문서를 에도 막부로부터 받았으나 귀국 길에 대마도 도주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죄상을 에도 막부에게 알리는 상소를 올리겠다고 위협했다. 안용복은 대마도 도주의 비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이 일본에 보내는 세륜미 한 섬은 반드시 열 다섯 말이고 면포 한 필은 반드시 서른 다섯 자이며 종이 한 권은 반드시 스무 장인데, 대마도 도주가 중간에서 빼먹고 세륜미 한 섬은 일곱 말이라 하고 면포 한 필은 스무 자라 하며 종이 한 권은 석 장이라 하니, 내가 막부에 대마도 도주가 막부의 속인 죄를 알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안용복의 엄포 외교는 효과를 보았다. 우선 대마도 도주의 나이 많은 아버지 종의진이 상소만은 막아달라고 호오키 주 태수에게 간청했다.

이상은 비변사의 심문을 받으며 안용복이 한 말이다. 일본쪽 기록은 어떨까? 돗토리 번주는 역시 이 때 에도에 가있었다. 안용복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쓰시마 도주의 아버지가 안용복을 만났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용복 일행은 6월 12일에 거처를 옮기고, 돗토리 번은 다음날 막부에 상황을 보고한다. 6월 21일 안용복 일행은 돗토리 번 성하로 초대돼 융숭한 대접을 받지만, 23일에 막부의 지시가 내려온다.

‘조선 배에 경비를 붙여 지킬 것. 쓰시마에서 통역을 보내줄 것이니 그와 상담해서 조선인을 나가사키로 보낼 것. 외국인의 소송은 나가사키에서만 취급함을 설명하고,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귀국시킬 것.’

즉 돗토리 번은 막부의 지시도 없이 마음대로 조선인을 상륙시키고 성내로 출입시킨 것이었다. 번은 급히 일행을 임시 거처로 옮기고 경비원을 붙인다.

7월 7일에 막부는 쓰시마 번에 통역 파견을 지시한다. 그러나 쓰시마 번은 조선 관계는 자신들만이 취급하게 돼있으므로 이번 일은 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이에 막부는 7월 24일에 다시 돗토리 번에 지시를 내려 안용복 일행을 나가사키로 보내지 말고 귀국시키라고 명한다.

호오키 주 태수 스스로의 이해 관계를 따져 보아도, 이러저러한 내용의 상소가 올라가는 것은 자신에게도 불리했다. 그는 몇 달 앞서 쇼군이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확인하는 결정을 내릴 때 그 자리에 배석했기에 상소가 올라가면 몹시 화를 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오키 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다케시마와 마츠시마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국경을 범하는 사람이 있거나 또는 대마도 도주가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여기서 호오키 주 태수가 조선 땅으로 인정한 다케시마가 울릉도이고 마츠시마가 독도임은 물론이다.(‘담판’)

이 역시 안용복의 진술이다. 이때는 도해금지령이 하달된 뒤였으므로 이런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안용복이 과연 호오키 주 태수를 만났는지 여부는 의심스럽다. 돗토리 번주가 에도에서 돌아온 것은 7월 19일이었다. 이때 안용복 일행은 감시를 받으며 임시 거처에 갇혀있었으며, 소송은 나가사키에서 접수하도록 지시받은 상태이므로 번주를 만나 담판을 벌였을 가능성은 없다.

안용복은 8월 6일 일본을 떠나 29일에 강원도 양양에 도착하고, 강원감사 심평에게 체포된다.

‘다케시마 1건’의 결말

그 해 10월 16일 쓰시마 번은 조선에 에도 막부의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통보한다. 한편 안용복 일행이 찾아왔던 일도 함께 전하고, 대일 외교는 쓰시마를 거치도록 돼있는데 자신들을 건너뛰고 바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던 일을 비판하며 묻고 있다. ‘지난 가을 귀국 사람이 문건을 올린 일이 있었는데, 조정의 명령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를 보면 안용복이 일본에 문건을 제출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조정은 ‘분변할 것이 있다면 역관을 에도에 보낼 것인데 왜 어리석은 포민을 보내겠는가. 백성이 설사 저지른 것이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알 바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이 일에 대한 공문 작성은 거부한다. 그리고 도해금지령에 대해서만 답서를 작성하지만 쓰시마 번이 문구를 문제삼아 두 번이나 접수를 거부, 결국 2년에 걸쳐 세 번째 답서를 보내 겨우 접수시킨다. 1698년 4월에 보내진 공문이 에도에 접수된 것은 7월, 그리고 1699년 1월에 막부의 결재가 조선측에 전해졌다. 이 해 10월에 쓰시마 번은 사태의 전말을 정리해서 막부와 조선 조정에 전달, 소위 ‘다케시마 1건’으로 불리는 조선과 일본의 영유권 분쟁이 정리된다.

‘담판’에서는 ‘이듬해인 1697년 1월에 대마도 도주는 형부 대보 평성상을 조선에 보내 에도 막부의 결정을 알려 왔다.1699년에는 일본측이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를 조선 영토로 다시 확인하는 최종적 외교 문서를 조선 조정에 넘겼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때 서계에 마쯔시마(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울릉도 도해가 금지됐으니 독도 역시 자연히 금지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조선 중신들이 본 안용복

그렇다면 당시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 안용복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의견은 크게 셋으로 갈린다.

하나는 ‘법을 어기고 다른 나라에서 일을 일으켰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견으로 영의정 유상운 등이 해당된다.

다음은 ‘죄를 논하면 죽여 마땅하지만, 조선-일본 관계에서 쓰시마 이외의 다른 통로가 가능함을 보고 쓰시마 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지금 안용복을 죽이는 것은 계책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으로 좌의정 윤지선 등이 해당된다.

끝으로 ‘안용복이 매우 놀라운 일을 하였으나, 국가에서 못하는 일을 능히 하여 공로와 죄과가 서로 덮을만하니 일죄로 결단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지사 신여철, 영부사 남구만 등이 해당된다.
 
한편 승지 유집일은 그가 안용복을 심문한 결과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있고 의심스러운 사정이 많아 다시 심문한 후 논죄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즉 월경과 관직 사칭이라는 죄명은 분명히 인정하되, 안용복의 공이 어디까지냐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안용복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긴 글을 풀어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확실해진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안용복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일본측 자료를 비교하면 맞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다. 여기서 실록의 기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이지 못하다. 두 기록 중에서 일리있는 것을 가려 취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일본의 자료도 정작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위 ‘다케시마 1건’에서 안용복의 역할과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안용복이 민간인으로서 용감하게 영토 수호를 위해 나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관직을 사칭한 것은 분명하고, 게다가 그 시점은 이미 막부가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내린 다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는 반감된다.

‘영웅 안용복’이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안용복의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용복을 부각할수록 조선 조정은 무능한 정부가 될 수밖에 없고, 어떻게 보면 그것은 식민사관의 또다른 모습인 것은 아닐까. 안용복이 파악했던 일본의 실정은 '오해'였지만, 그 오해가 조선 조정이 적절한 대응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보다 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일본측 사료의 연구 성과는 나이토 세이츄, ‘독도와 죽도’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기나긴 스크롤의 압박으로 ‘씨바, 그러니까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거냐?’하고 댓글을 달려는 사람들을 위한 보너스로 같은 책에서 몇 부분을 더 요약 발췌한다.

시마네 현은 마쯔시마(독도)를 다케시마(울릉도)의 속도로 보고 ‘다케시마 외 1도’로 취급하여, 이들을 시마네 현 지적에 편입하는 데 대해 내무부에 질문했다. 이에 대해 내무성은 다케시마 외 1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1877년에 태정관의 결재를 요구한다. 이에 대해 3월 29일에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 참의의 오쿠마 시게노부, 테라지마 무네노리, 오키 타카토우 등은 원안대로 승인 결재했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리앙쿠르 암(독도)에 대한 영토 편입 및 불하원을 제출하려고 1904년 내무성 지방국에 갔지만 접수를 거부당했다. 내무성 당국자는 ‘러일전쟁 중의 시기에 한국 영지의 의심이 있는 불모의 암초를 취하는 것은 외국에게 우리나라가 한국 병탄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크게 갖게 한다’며 출원을 각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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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