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7일에 썼던 글입니다.)
애초 야심차게(?) 써보려 했던 글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제대로 분석해보는 것이었다. '탈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재인식'이 보수 언론에서 떠들어대듯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결정판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때문이다. 안그래도 대학가에서 '쓸만한 현대사 교재가 없다'는 말이 나온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니 모든 걸 '미제의 음모'로 설명하려드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같은 책이 아직도 새내기 추천도서에 빠지지 않고 선정되고 있지 않은가(비록 약간의 비판적 코멘트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이런 나의 '야심찬' 계획은 그러나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이뤄지기 힘들 것 같다. 그건 '재인식'이 엄청나게 두껍기 때문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고(각권 대략 3만원), 차분히 글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제대로 비판할 능력이 없다. 결국 '재인식'은 아직 사지도 구해보지도 읽지도 못했다.
따라서 책을 제대로 읽어보기에 앞서 그간 우리 사회의 '일부' 탈근대론자들(똑같이 탈근대를 표방한다고 해도 박지향, 이영훈 교수와 임지현, 조한혜정 교수를 같은 그룹으로 묶을 수는 없다)에 대해 느꼈던 의문을 이 글로 정리해보려 한다. 이름하여, '목차만 읽고 쓰는 <재인식> 비판' 정도랄까.
<재인식> 1권은 식민지 시기가 주요 서술대상이고, 2권은 해방과 5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는 해도, 1권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대해 웬지 나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민족적 저항-일제의 탄압', '독립운동가-친일매국노'의 대립만으로 식민지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이미 익숙해있고, 또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편집자로 소개된 필자들의 글 역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박지향, 이영훈, 김철 교수) 필자들의 책과 논문은 몇 편 접해보았고, 현실 정치에서 그들의 행보는 별개로 한다면 나는 그들의 주장에서 매우 많은 시사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근대'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간에, 그리고 조선의 자생적인 발전이 가능했으리라고 보든지 보지 않든지간에, 한국 사회에 '근대'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식민지 시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미화도 찬양도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다. '식민지 근대'라는 왜곡된 형태로 전개된 한국 사회의 발전이 현재의 우리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그 복잡한 양상과 다양한 층위를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서는 현대 한국사회의 정확한 이해 역시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상식적인' 역사서들은 이런 관점을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측면에서 1권은 실로 역사의 '재'인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2권이 정말로 역사를 '재'인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눈에 띠는 것이 한미동맹의 성립과정 재고찰, 농지개혁문제인데, 미국은 한미동맹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승만 정권이 미국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고, 농지개혁 역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된 토지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 이미 당대인데,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재인식'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수정주의(좌파?) 역사서술과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이건 두 시각을 '지양'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출했다기보다는, 이전의 '전통적' 역사서술로 돌아간 듯하다. 더구나 '좌파적' 역사서술이 아직 일반의 상식이나 주류 인식도 아닌 다음에야.
내가 '재인식'의 구입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이런 것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재밌는 건 1권일 것 같은데, 웬지 꽤나 아는 내용이 나올 것 같고(실제로 읽어본 논문도 실려있다), 비판을 해보려면 2권이 적당할텐데 이걸 돈주고 사보기는 싫고.--; 저자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무슨 오만방자한 태도냐고 호통을 칠 법하지만 한정된 돈밖에 없는 나로서는 퍽 진지한 고민이다.
어쨌든 이상의 내용은 목차만 읽고 쓴 인상비평이니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본다면 민망할 정도로 오해와 편견에 가득차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재인식'에 참여한 '탈민족주의자' 이영훈 교수는 '교과서 포럼'의 회원이기도 하다. '교과서 포럼'의 목표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르치고 자라나는 세대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탈민족을 주장하는 사람이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자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좌파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우익 국가주의를 옹호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김철 교수 역시 <'국민'이라는 노예>라는 책을 낸, 탈민족/탈근대적 국문학 비평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마광수 교수를 쫓아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들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나의 사고체계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음란소설'에 반대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 '표현의 자유'같은 '근대적' 가치는 그에게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박지향 교수는 과거 탄핵때 '탄핵 옹호' 칼럼을 써서 많은 네티즌들이 이름을 알게 된 몇 안되는 교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물론 당시 그 칼럼의 내용 자체는 틀릴 것이 없었다. '절차적으로' 탄핵은 정당했고, 그것을 '헌정의 중단'이라며 흥분했던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한국 기득권 세력의 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점에서 꼭 그 '절차적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주장했어야 했을까.
'진보'란 정의하기 나름이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다 그 속뜻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보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이야말로 진보가 끌어안아야 할 인식론 아닐까? 근대가 고안해낸 폭력적 체제, 억압 장치들, 민족의 이름으로 감춰지는 것들,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탈근대, 탈민족의 인식론인 바, 이들은 진보 진영과 친화성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 우리 현실에서 일부 탈근대주의자들이 만나는 것은 보수 언론이고, 탈민족주의자들이 손잡는 것은 뉴라이트이다. 이 기묘한 동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진영이 포용력이 없어서인가, 탈근대론자들의 정신이 분열되어있기 때문인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덧글 1.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역사비평> 봄호에 이상과 유사한 내용의, 탈민족주의자와 뉴라이트의 연대를 비판하는 평론이 실린 것을 알았다. 조금만 더 일찍 쓸 걸 그랬나.--;
덧글 2. 그럼에도 위 학자들의 글은 매우 재밌으며 유익하다. 교양삼아서라도 몇 권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현실에서 보수적이라고 학문까지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영웅 만들기> <슬픈 아일랜드>,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등이 부담없이 읽을만하다.
이런 나의 '야심찬' 계획은 그러나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이뤄지기 힘들 것 같다. 그건 '재인식'이 엄청나게 두껍기 때문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고(각권 대략 3만원), 차분히 글을 쓸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제대로 비판할 능력이 없다. 결국 '재인식'은 아직 사지도 구해보지도 읽지도 못했다.
따라서 책을 제대로 읽어보기에 앞서 그간 우리 사회의 '일부' 탈근대론자들(똑같이 탈근대를 표방한다고 해도 박지향, 이영훈 교수와 임지현, 조한혜정 교수를 같은 그룹으로 묶을 수는 없다)에 대해 느꼈던 의문을 이 글로 정리해보려 한다. 이름하여, '목차만 읽고 쓰는 <재인식> 비판' 정도랄까.
<재인식> 1권은 식민지 시기가 주요 서술대상이고, 2권은 해방과 5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는 해도, 1권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대해 웬지 나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민족적 저항-일제의 탄압', '독립운동가-친일매국노'의 대립만으로 식민지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이미 익숙해있고, 또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편집자로 소개된 필자들의 글 역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박지향, 이영훈, 김철 교수) 필자들의 책과 논문은 몇 편 접해보았고, 현실 정치에서 그들의 행보는 별개로 한다면 나는 그들의 주장에서 매우 많은 시사점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근대'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간에, 그리고 조선의 자생적인 발전이 가능했으리라고 보든지 보지 않든지간에, 한국 사회에 '근대'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식민지 시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미화도 찬양도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다. '식민지 근대'라는 왜곡된 형태로 전개된 한국 사회의 발전이 현재의 우리 일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그 복잡한 양상과 다양한 층위를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서는 현대 한국사회의 정확한 이해 역시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상식적인' 역사서들은 이런 관점을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측면에서 1권은 실로 역사의 '재'인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2권이 정말로 역사를 '재'인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눈에 띠는 것이 한미동맹의 성립과정 재고찰, 농지개혁문제인데, 미국은 한미동맹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승만 정권이 미국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얻어낸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고, 농지개혁 역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된 토지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 이미 당대인데,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재인식'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수정주의(좌파?) 역사서술과는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이건 두 시각을 '지양'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출했다기보다는, 이전의 '전통적' 역사서술로 돌아간 듯하다. 더구나 '좌파적' 역사서술이 아직 일반의 상식이나 주류 인식도 아닌 다음에야.
내가 '재인식'의 구입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이런 것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재밌는 건 1권일 것 같은데, 웬지 꽤나 아는 내용이 나올 것 같고(실제로 읽어본 논문도 실려있다), 비판을 해보려면 2권이 적당할텐데 이걸 돈주고 사보기는 싫고.--; 저자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무슨 오만방자한 태도냐고 호통을 칠 법하지만 한정된 돈밖에 없는 나로서는 퍽 진지한 고민이다.
어쨌든 이상의 내용은 목차만 읽고 쓴 인상비평이니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본다면 민망할 정도로 오해와 편견에 가득차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내가 궁금한 것은,
'재인식'에 참여한 '탈민족주의자' 이영훈 교수는 '교과서 포럼'의 회원이기도 하다. '교과서 포럼'의 목표는 익히 알려졌다시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르치고 자라나는 세대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탈민족을 주장하는 사람이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자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좌파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우익 국가주의를 옹호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김철 교수 역시 <'국민'이라는 노예>라는 책을 낸, 탈민족/탈근대적 국문학 비평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마광수 교수를 쫓아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들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나의 사고체계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음란소설'에 반대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 '표현의 자유'같은 '근대적' 가치는 그에게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일까?
박지향 교수는 과거 탄핵때 '탄핵 옹호' 칼럼을 써서 많은 네티즌들이 이름을 알게 된 몇 안되는 교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물론 당시 그 칼럼의 내용 자체는 틀릴 것이 없었다. '절차적으로' 탄핵은 정당했고, 그것을 '헌정의 중단'이라며 흥분했던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한국 기득권 세력의 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점에서 꼭 그 '절차적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주장했어야 했을까.
'진보'란 정의하기 나름이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다 그 속뜻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보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이야말로 진보가 끌어안아야 할 인식론 아닐까? 근대가 고안해낸 폭력적 체제, 억압 장치들, 민족의 이름으로 감춰지는 것들,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탈근대, 탈민족의 인식론인 바, 이들은 진보 진영과 친화성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 우리 현실에서 일부 탈근대주의자들이 만나는 것은 보수 언론이고, 탈민족주의자들이 손잡는 것은 뉴라이트이다. 이 기묘한 동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진영이 포용력이 없어서인가, 탈근대론자들의 정신이 분열되어있기 때문인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덧글 1.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역사비평> 봄호에 이상과 유사한 내용의, 탈민족주의자와 뉴라이트의 연대를 비판하는 평론이 실린 것을 알았다. 조금만 더 일찍 쓸 걸 그랬나.--;
덧글 2. 그럼에도 위 학자들의 글은 매우 재밌으며 유익하다. 교양삼아서라도 몇 권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현실에서 보수적이라고 학문까지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박지향, <일그러진 근대> <영웅 만들기> <슬픈 아일랜드>,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등이 부담없이 읽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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