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3. 3. 5. 18:41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 캠프 새정치위원장. MB 정부의 인권위 독립성 침해에 저항해 국가인권위원장직을 사임. 참여정부 때 인권위원장으로 임명. 이런 프로필을 보고 나면 아마도 대개 어떤 사람이겠구나 하는 선입견을 갖게 될 것같다. 하지만 안경환 전 위원장은 그렇게 간단히 규정해버릴 인물은 아니다.

 

인권위원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안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인권위원장이 되고 나서도, '최소한의 정치적 통제'를 말했던 노 전 대통령에게 그런 것 고려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교수 시절에는 보수 매체에도 가리지 않고 기고했다. 회고록 <좌우지간 인권이다>(살림터, 2013)에는 함세웅 신부와 함께 김형오 전 국회의장,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추천사가 들어있다. 이념만 놓고 보면 뒤의 두 사람과 안 교수를 같은 편으로 묶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념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합리적 인사, 온건한 중도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 인권위원장 취임 이전까지 언론의 평가는 그랬다. 그런 안 교수를 MB 정부는 투사로 내몰았다.

 

이 책은 안 교수의 인권위원장 재직 3년의 기록이다. <신동아>에 연재했던 글을 보완해 묶으면서 촛불집회 등 주요 사건에 대한 인권위 결정문 등 자료를 함께 엮었다.

 

저자는 '인권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인류 보편의 가치'(p. 11)라고 역설하지만, 사실 인권의 내용을 두고는 정치 세력마다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거기서 어떻게 공통분모를 넓히느냐가 사회 발전의 척도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럽고, 많을수록 좋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수준이라는 게 너무 저열하다는 거다. 북한 인권 문제를 보자. 일부 언론은 '좌파 정부가 만든 인권위가 북한 인권을 외면한다'고 선동하는 데 급급했다. 여기 대한 안 위원장의 설명을 보자. 간결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하다.

 

"인권위법상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가 국가기관인 경우에만 구제가 가능하다. 북한 주민이 인권위에 진정할 수 있으려면 북한 정부를 대한민국의 국가기관으로 인정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pp. 70~71, 강조는 인용자.)

 

물론 이 문제를 비판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법을 고치자고 주장할 일이다. 왜 인권위에 권한 밖의 초법적인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일까?

 

이 뿐만이 아니다. 촛불집회 때는 '인권위가 시위대만 두둔하고 매맞는 전경은 방치한다'는 비난이 비등했다. 물론 다분히 호소력이 있지만, 이 또한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인권위는 경찰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구제할 권한이 없다. 그것은 경찰과 검찰의 몫이다. ... 인권위는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만을 다룰 수 있을 뿐, 공권력에 '대한' 침해는 관할권 밖이다." (p. 127,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이런 내용은 인권위법 30조 1항 1호에 엄연히 규정돼있다.

 

물론 이것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다만, 역시 법이 말도 안 된다고 비판할 일이다.

 

놀라운 건 이런 사정이 법 조항뿐 아니라 인권위 결정문에도 상세하게 설명돼있다는 거다. 모르긴 해도 보도자료에도 다 써있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저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 많은 기자들은 도대체 기사를 어떻게 썼던 걸까? 모르고 썼나, 아니면 알고도 못 본 체 한 걸까?

 

인권위 조직 강제 축소에 항의해 사임한 안 위원장의 이임사를 눈물을 참으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 분노와 아픔은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한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다집시다. 제각기 가슴에 품은 작은 칼을 벼리고 벼리면서, 창천을 향해 검무를 펼칠 대명천지 그 날을 기다립시다."

 

대명천지 그 날은 왔을까? 언제나 올까? 현병철 위원장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인권위를 보며,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언제 찾아올지 답답해지기만 한다. 내가 벼려야 했던 작은 칼은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