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3. 2. 24. 18:08

1951년, 미국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 영국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을 법률적으로 마무리하는 대일평화조약 공동초안 작성을 마무리한다. 미국은 관련국에 초안을 전달했는데, 우리나라가 이를 받아본 건 1951년 7월이었다. 이 초안에서 한국의 영토 문제와 관련된 조항은 이렇게 규정돼있었다.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당장 문제점이 지적됐다. 우리나라에 딸린 섬이 수천 개인데 고작 세 개만 거론한다면, 나중에 일본이 '조약에 명시되지 않은 나머지 섬들은 모두 우리 영토다'같은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굳이 섬을 열거해야 한다면 영토의 가장 바깥에 있는 독도와 파랑도(이어도)를 명시하는 게 나았다. 정부는 주미 한국대사관에 훈령해 조약문에 이들 두 섬이 포함되도록 미국과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양유찬 주미대사와 한표욱 1등서기관이 함께 미 국무부 덜레스 특사를 만난 건 51년 7월 19일. 양 대사는 조약문에서 한국 뒤에 독도와 파랑도가 열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덜레스 특사가 물었다.

 

"독도와 파랑도는 어디 있는 섬인가요?"

 

한표욱 서기관이 답했다.

"두 섬은 동해에 있고, 대체로 울릉도 근처에 있을 겁니다."

 

한 서기관은 독도의 정확한 위치조차 덜레스에게 알려주지 못했고, 심지어 제주도 남단에 있는 파랑도를 동해에 있다고 말했다. 양 대사도 자세한 정보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영토 문제를 외국과 공식 논의하는 자리에서, 우리 외교관들은 '독도는 우리 땅' 수준의 주장 외에 아무 논리도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셈이었다.

 

한국의 요구를 접한 국무부는 자료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이 말하는 독도가 어떤 섬인지 미국에 있는 자료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독도의 서양 이름인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 일본 이름인 다케시마는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한국 이름인 독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일평화조약 준비를 위해 정부가 구성한 외교위원회의 중요 인사였던 유진오 고려대 총장조차

 

"본토에서 떨어진 섬 이름을 예로 들 필요가 있다면 차라리 덕도(Yiancourt Rocks)같은 것을 넣는 것이 좋다"

 

라고 이름을 잘못 쓸 정도였으니, 미 국무부가 독도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조사에 곤란을 겪게 된 국무부는 결국 주미 한국대사관에 다시 독도의 위치를 문의한다. 대사관 직원의 답은 이랬다.

 

"독도는 울릉도 인근, 혹은 다케시마 근처에 있다고 믿으며, 파랑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답변이었다. 한국 정부는 영유권을 주장하는 섬의 좌표조차 외국에 밝히지 못하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독도 점유를 위해 오래 전부터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외무성 주도로 1947년 '일본의 부속소도'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미국 등 연합국에 배포했는데, 여기서 "울릉도에 대해선 한국 명칭이 있지만, 리앙쿠르 암에 대해서는 한국명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적어넣었다.

 

그러면서 독도의 지리와 역사를 상세히 서술하고, 일본 어민들이 오래 전부터 독도에서 조업을 했다고 강조한다.

 

섬의 위치도 모르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나라와, 섬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는 물론 영유권의 근거를 (물론 허위이지만) 조목조목 제시하는 나라. 일본의 주장이 허위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이 내릴 판단은 명확한 것이었다. 마침내 미 국무부 러스크 극동담당차관보는 51년 8월 한국에 이런 서한을 보낸다. 이른바 '러스크 서한'이다.

 

"독도와 관련해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 하에 놓여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실로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러스크는 독도에 대한 일본 측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에서 한국의 영토 부분에는 독도가 포함되지 못한다.

 

당시 상황을 따져보면 참작할만한 구석이 있긴 하다. 1951년은 6·25 전쟁으로 나라의 생존 자체가 위험한 형편에 독도까지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이래 외교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근대 외교 경험이 전무했고 인력도 없었다. 외무부 전체 직원이 30명에 불과하고, 외무부 장관이 직접 번역을 담당하는 형편이었다. 메이지유신 이래 오랜 기간 제국주의 외교를 실천해 온 일본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토문제같은 중차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한국 정부는 현지 공관에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고, 현지에서도 자료를 찾아보거나 본국에 문의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걸까.

 

물론 러스크 서한은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었고, 이같은 판단이 샌프란시스코 조약문의 근거가 된 것도 아니다. 영국을 비롯한 다른 연합국과 논의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때문에 이 조약을 근거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은 억지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점은 이상의 일화를 소개한 <독도 1947>(정병준, 돌베개)에 대한 또 다른 서평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만 그 때와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아무 근거도 자료도 없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당시 주미 대사관 직원과, 겨우 실효지배 사실만 언급하며 "천지개벽을 두 번 하더라도 독도는 우리 땅(2011.4.1)"이라고 주장한 이명박 대통령 사이엔 무슨 차이점이 있을까?

 

대통령 뿐일까? 모두가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줄'이라는 가사는 달달 외우지만, 정작 거기에 뭐라고 써있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자료에는 눈감은 채 '독도는 우리 땅'만 되뇌이고 있다가, 일본 측이 내미는 자료를 처음 보고는 당황하며 억지를 부리게 되는 일은 없을까?

 

모르면 당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본문만 9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집어들기에 매우 부담스럽지만, 일단 펼치고 나면 그 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독도에 관한 새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워낙 상세한 서술이다보니 간혹 중복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자연스레 중요한 내용이 정리되는 효과가 생기기도 한다. 독도를 지켜야 할 우리 모두가 한 번 읽을만한 책이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