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29. 21:26
(2005년 2월 23일에 썼던 글입니다.)


일본이 보는 한국
 
※ 이것으로 기무라 칸(木村幹)의 <한반도를 어떻게 볼까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에 대한 요약/번역은 끝났습니다. 그동안은 번역 소개라는 목적에, 그리고 '술이부작'이라는 제 닉네임에 충실하게 제 의견을 집어넣는 일은 자제해왔습니다. 이번에는 글을 옮기면서 제가 느꼈던 점들을 적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연재를 마치며
 
이 책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를 목표로 삼은만큼 상당히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성', '중립성', '자료', '수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대개 결과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기 쉬운데, 저자는 그런 함정도 비교적 잘 피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통계와 자료를 중시하면서도, 그런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을 강조하는 것도 높이 살만합니다.

하지만 거슬리는 점도 꽤 있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책은 본격적인 논문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교양 서적이고, 분량도 엽서크기로 2백 페이지도 안되는 책이니, 문고판으로서 갖게 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점을 다 감안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1. 식민화와 소국의식

조선 지식인들은 과연 '소국의식'에 빠져있었는가. 그렇기에 근대화를 추진하지 않고 앉아서 망하게 된 것인가. 여기에 대해 저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이같은 주장은 현상만 놓고 보면 옳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역사적 주장입니다. 이 주제는 짧게 설명하고 끝낼 것이 아니니, 나중에 따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다른 내공 높은 분이 써주신다면 물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현대 한국의 소국의식에 대한 저자의 설명 -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한국 민족주의는 열등감에서 동력을 얻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는 안 그런가는 연구해 봐야겠습니다만, 저는 민족주의 쪽으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큰 호기심은 생기지 않는군요. 아울러 '소국의식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통일을 해야한다!'라는 주장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뒤집어보면 '통일되지 않는 한 우리는 소국이다'라는 얘긴데, 결국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지금 상태 그대로도 우리는 충분히 유력 국가 중의 하나입니다(그렇다고 통일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

2. 식민지와 경제발전

식민지 시기에 대한 고찰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aciles님이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식민지에 대한 착취는 공식 경제 지표의 통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적, 비경제적 착취가 근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식민지와 종주국 사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관계를 무시하고 경제 지표만을 토대로 논증을 하다보니, 식민 통치로 인한 민중의 고통은 단순히 경제발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빈부격차에 의한 것으로 환원되고 맙니다. '식민지'라는 현실은 여기서 사라져 버립니다. 제가 경제사 전문가가 아니라 더이상의 언급은 불가능합니다만, 저자 스스로 첫머리에서 자기 입장이 몰역사적이라고 비판받는다고 했는데,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

다행히도 저자는 '그러니까 식민 지배는 좋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당대 사람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경제 상황이 어떻든 식민 지배는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기존 토론 구도 자체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 공통의 역사인식은 불필요한가

가장 가혹한 비판을 받은 부분이며, 저 역시 가장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공통의 역사인식은 현재 불필요하며, 일본이 거기 나설 현실적 이유도 없는 이상 가능하지도 않다' 정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사를 정리하고 공통의 역사인식을 만드는 데에 일본의 국익이 과연 없을까요? 장기적으로 동북아시아 공동체 형성이나 경제통합, 나아가 동남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통합을 생각할 때 일본이 과거사를 해결하지 않고는 이것이 추진될 수 없으며, 또 없어야 합니다. 이건 벨기에가 콩고에 사죄하지 않았다거나,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사죄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일본과 한국, 중국은 같은 지역, 같은 생활권을 이루고 있고, 지역통합을 생각한다면 통합된 지역주민간의 공통된 인식은 필수적입니다. 일본이 그토록 원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나 재무장 역시 과거사 해결이 없이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미국이 뒤를 밀어주고 있긴 하지만, 또다른 상임이사국 중국이 반대하는 한 일본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과거'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동아시아 국민들과 공통의 역사인식을 마련하는 것은 일본의 국익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일본 지도층들도 과거에는 이렇게 생각했던 듯합니다만 최근에는 방향이 바뀐 것 같은데, '과거'의 최종적 해결을 위해 우리 정부도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최근의 동향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죄는 98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정리되었다는 입장이고, 현 정부도 과거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으로 압니다.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문제 건드리지 말자는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카드를 스스로 버린 것 같아 섭섭합니다. 당장 한일 FTA가 추진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역 협력 관련해서 많은 현안이 생길텐데, 이런 것에 과거 문제를 활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전문가인 저의 착각일까요.

다행히도 최근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집필한 역사 교과서가 출간되었습니다. 비록 공식 교과서는 아니지만, 3국의 역사인식이 보다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한편,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아본다는 취지로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이 작업은 역설적으로 '우리는 일본을 어떻게 보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일본, 일본인은 어떻습니까? '일본인은~', 나아가 '왜놈은~', '쪽바리는~' 하는 식으로 손쉽게 그들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월감'과 '피해의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우리의 일반적 일본 인식을 넘어서,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요? 저부터도 일본의 역사는 19세기 말부터, 그것도 한반도와 관련해서나 조금 알고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고 남말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한일관계사를 너무나 특수한, 혹은 편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일제의 탄압'과 이에 맞선 '민족의 항쟁'이라는 구도를 넘어서, 제국주의의 세계적인 지배와, 이에 대항한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좀더 넓은 관점에서 일제 치하를 살펴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칭송하면서도 '대일본제국'이라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를 떠는 전도된 역사인식에서는 벗어나야겠습니다.

금방 끝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시간을 끌었습니다. 2월 한달은 이것만 갖고 붙든 꼴이 되었군요. 곧 본업(?)인 제3세계 내전 이야기로 복귀하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약 한 달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 환경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불친절한 긴 스크롤과 어색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답글로 먼댓글로 좋은 가르침 주신 많은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