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29. 21:22
(2005년 2월 17일에 썼던 글입니다.)


일본이 보는 한국
 
※ 이 글은 기무라 칸(木村幹)의 <한반도를 어떻게 볼까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를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중의 '조선반도', '북조선', '일한', '일조'는 각각 '한반도', '북한', '한일', '북일'로 옮겼으며, '조선', '조선인'은 1945년 이전을 지칭할 경우는 그대로 '조선', '조선인', 그 이후일 경우는 경우에 따라 한국, 한반도, 한국인 등으로 옮겼습니다.
 
2004년 5월에 발매된 이 책은 일본내 한류 열풍으로 인해 변한 상황을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가졌던 과거의 인식은 현재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탈고정관념'을 표방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제3의 시각'이 무엇인가 정도로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의견이나 보충 설명 등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꺼리지 않고 달아주시면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6. 제6연습 - 한일관계는 왜 꼬였는가
 
- 한일 사이의 높은 장애물
 
이렇게 식민지배에 대한 황폐한 논의가 계속되는 것은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대체 왜 이렇게 꼬여버렸을까요?
 
이제까지의 한반도에 관한 논의가 다만 감정적 논쟁으로 황폐해진 최대의 원인은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서 소위 '과거'청산이 미해결인 채로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북한간에는 국교가 없고 양국간 교류도 한정되어 있으니, '과거'를 비롯한 여러 문제가 '미해결'인 것도 어느정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유례없이 밀접한 관계가 있고, 매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양국을 오간다. 그런데도 '과거'의 문제는 여전히 한일 사이에 깊이 가로놓여있다. 양국 관계는 왜 이렇게 기묘한 것이 되었을까.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은 각각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말을 살펴보자.
 
'부정적 시각'의 예로는 여기서도 이 책을 들어보자. 한국 교과서의 식민 지배 기술 내용에 대한 항의이다.
 
불행하게 발생한 일부의 나쁜 일을,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짓으로 말하는 한국인의 습성은 잘 알려져있지만, 일본인은 자신의 명예와 정치적 이해를 걸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하는 커다란 거짓말과는 결연히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국민의 역사>)
 
'긍정적 시각'의 예로는 역시 이 신문의 사설이 적절하겠다.
 
이 악순환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는 것이 진정한 새 시대로의 길이다. 그 출발점은 역시, 36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주었음을 한 사람 한 사람이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똑똑히 하지 않고 '어디까지 사죄해야 하는 건가'라거나, 국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역사관을 내세운다거나 하는 것은 한일관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아사히 신문, 1998. 9.30)
 
양측의 주장은 각각 매우 단순하다. '부정적 시각'에 의하면,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인의 습성 탓이고, 그게 바로잡히지 않으면 양호한 한일관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긍정적 시각'에 의하면, 한일관계가 불안정한 것은 일본인 각자의 '인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완전히 반대인 듯이 보이는 양측의 사고방식에는 큰 공통점이 존재한다.  '과거'를 둘러싼 한일의 논의가 끝나지 않는 것은 어느 쪽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고, 그것이 시정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틀린 쪽'이 철저히 회개하고, '옳은 쪽'에게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어느쪽이 양보해야 하는가는 달라도, '공통의 역사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양측이 일치한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일본과 한반도처럼, 지배했던 나라와 지배당했던 나라가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높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걸까? 유럽 여러 나라와 그 식민지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간의 현재의 관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 '공통의 역사인식'은 필요한가
 
독일은 전쟁을 반성하고 주변 국가들과 공통의 역사인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많이들 말합니다. 그러니 유럽 국가들은 '과거'청산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전후 독일, 정확히는 서독의 '과거' 극복을 위한 노력은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은 독일 나름의 생각이 있고, 개인 보상 방법 등 여러 문제에서 그들의 '교묘함'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독일의 방법이 일본에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독일이 '2차대전이라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과거'를 청산했다는 것과, 구미 제국들이 식민지와의 여러 문제를 청산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는 '공통의 역사인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나라, 이를테면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충분한 사죄와 보상을 행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민 지배에 관해 대부분의 구미 제국은 사죄나 보상을 철저히 한 것과는 거리가 먼 상태이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서 식민 지배가 '나쁜 것'이었다고 하는 확고한 인식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과 대처가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식민 지배의 위법성과 잔학성이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되었다면, 알제리 민족운동의 탄압과 고문을 묵인했던 당시 법무장관 미테랑이 이후에 프랑스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이런 구미 제국의 역사관을 용인할리 없다. 인도, 알제리, 인도네시아 등 구 식민지 국가에서 출판되는 서적의 식민 지배에 관한 기술은 서양 열강을 비판하고 식민 지배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말들로 가득 차있다. 과거의 종주국과 식민지 사이에 '공통의 역사인식'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보통 구 종주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과거 식민 지배와 그에 관한 일들이 현재의 정치 사회적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 사이에서는, 한일 사이에서 말하는 의미에서의 '과거'가 청산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우호 관계에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는 다른 구 종주국 및 식민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부정적' '긍정적' 양측의 시각에서 논의하듯이 어느 한 편의 생각이 틀렸다는 차원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양국 관계의 특수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거리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두 가게가 이웃해있다. 영업 상태가 좋았던 한쪽이 경영이 기울어가는 다른 쪽을 사들여 자기 가게를 확장하려 했던 '과거'가 있다. 선대의 관계자는 여전히 당시의 일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갖고 있고, 서로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양측은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매일 일상적으로 가게를 열고 같은 거리에서 영업을 한다. 상인 모임에서 마주쳐도 그들이 '과거'의 문제를 다시 꺼내는 일은 없다.
 
처음에는 상인 모임에서도 기분나쁜 관계였다. 때로는 서로 욕을 퍼붓고 멱살을 잡고 싸울 뻔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한 쪽이 다른 쪽을 결정적으로 때려눕힐 수 있다면 얘기는 간단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언젠가부터 싸움을 그치고, 공공장소나 상대방 앞에서는 그 얘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계기는,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 상인들이 중재에 나서서 반 강제로 두 사람의 체면을 살려 일종의 '화해의 의식'을 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날 이후로는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임에서의 악수이든, 회식에서의 건배이든, 일종의 계기가 없으면 양측은 계속해서 과거의 문제를 다시 꺼내고 싸움을 일으켰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의 영업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해서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은 반복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한일 사이에는 이 '화해의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의 대가
 
한일 관계가 여전히 꼬여있는 원인은 지금까지 양자가 '화해의 의식'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군요. 종주국과 식민지간의 '화해의 의식'이라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구 종주국 사람들과 식민지 사람들이 정상적인, 대등한,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여태까지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강자와 약자, 상하의 관계였던 양자를 어떻게 해서 대등한 관계로 만들고, 어떻게 이 관계를 양측에 납득시키는가이다.
 
지배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제 그들의 우월적 지위를 포기해야 함을, 그리고 지배당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인식됨을 실감하게 하고, 더이상 서로 적의를 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강자가 약자와 싸워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 - 이것이 가장 알기 쉬운 '화해'의 계기이다.
 
많은 식민지에서 일정한 민족운동이 있었고, 그것이 승리함에 따라 식민지가 독립을 얻었다. 이런 경우 운동의 최종국면에서는 종주국과 민족운동 지도자간에 독립을 위한 교섭이 행해진다. 독립을 눈앞에 두고 승리를 자랑하는 식민지와, 자기 힘의 한계에 직면한 초췌한 종주국. 양자는 스스로의 승패를 음미하게 된다.
 
세계 최대의 제국과 세계 최대의 식민지,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그 전형이다. 인도 총독 마운트바덴 경과 초대 인도 수상 네루의 다음과 같은 장면은 상징적이다. 조금 길지만 살펴보자.
 
자정이 조금 지나, 인도 의회 대표단이 총독 관저를 찾았다. 새 제헌의회 의장 자격으로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가 인도 총독에게 엄숙하게 독립 인도의 초대 총독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해온 것이다. 마운트바덴 경은 거듭 감동을 얼굴에 나타내며, 자신은 인도 국민이 되었고, 인도를 섬길 것을 약속했다. 이어서 네루가 총독의 동의를 얻기 위해 독립 인도의 초대 내각을 구성할 각료 명단을 총독에게 건넸다.
 
그 후 마운트바덴은 포도주 병을 집어 사람들의 잔을 채웠다. 그는 잔을 들어 건배했다. '인도를 위하여!' 네루는 한 모금 마시고 이어서 마운트바덴에게 잔을 권하고 건배했다. '조지 6세를 위하여!' 이 건배에 영국인 총독은 찬양과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걸까. 얼마나 큰 괴로움을 당했으면서도, 이 인물은 우아한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고 이런 밤에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이 밤, 자유를> 하권, 인명 표기는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역자)
 
강대한 영국이 인도의 저항을 억누르고 통치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인도인들의 민족운동으로 인해 계속할 수 없게 되고, 패배를 인정한 영국은 철수를 결단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여태까지 적대관계였던 양측은 얼굴을 맞대고 모인다. 영국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인도의 장래를 축원하며, 인도는 떠나는 영국에 관대함과 위대함을 선보이며 스스로를 자랑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인도 지배 '이야기'가 끝난다.
 
양자는 여기서 식민 지배라는 '이야기'가 끝난 것을 이해하고 납득한다. 그들의 이해와 납득은 신문과 전문 등을 통해 양국 국민에게도 깊이 전해진다. 그래서 식민 지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거두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한반도가 한반도 사람들의 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이해에 의하면, 자기들은 연합국에 패한 것이지 한반도에 패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은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넘겨주고 철수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대한 패전을 이유로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은, 바꿔서 보면 한반도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본 지배를 타파하고 스스로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할 귀중한 기회를 잃었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독립을 회복하고 스스로의 국가를 갖게 되었을 때, 스스로의 관대함과 자존심을 자랑해야 할 일본은 불행히도 그들 눈앞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과 한반도 사람들은 스스로가 관련된 식민지배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면을 빼앗긴 것이다. 양측에게 이 '이야기'는 영원히 미완성이다. 한반도 지배를 총괄하고, 스스로 거기서 철수할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 일본인은 그 후로도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으로 나뉘어 끝없이 싸웠다. 일본인은 아직 이 '이야기'가 영웅담인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비극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독립'과 '해방'이라는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민족 독립운동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장 핵심인 마지막 장면, 승리한 그들이 일본인 앞에서 환호하는 장면을 영원히 잃었다. 민족적 좌절이 해소될 기회를 잃고, 그 울분은 잃어버린 마지막 장면을 찾아 방황하게 됐다.
 
일본과 한국이 언제까지나 '과거' 문제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뒤틀리는 최대의 원인은 단순한,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한 부분이라고 말해도 좋다. 일본과 한반도의 전후 관계는 그 첫 단계에서 단추를 잘못 끼웠다.
 
- 또 한 번 잃어버린 기회
 
어쨌든 그 '화해의 의식'을 하면 되겠군요. 그래도 지금은 한일간에 이만큼이나 교류가 있으니, 그런건 먼 옛날에 했어도 좋은 것으로 생각됩니다만..첫 단추는 잘못 끼웠어도, 그 후에는 기회가 없었을까요?
 
양복 단추를 잘못 끼운 거라면 다시 끼우면 된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이 밀접히 연관된 양국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일 양국의 화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를 하고 '이후 이 문제는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납득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일 사이에서도 그런 노력은 수없이 있었다. 정상회담때마다 발표되는 여러 선언과 성명문은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화해의 의식'이 되지 못했다. 식민지가 스스로의 독립운동에 의해 독립하기까지는 긴 과정이 있고, 종주국과 식민지 양쪽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상황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양측에게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고, 식민지배를 어떻게 끝낼까는 자기 생활과 밀착된 문제이다.
 
한일 양측의 국민에게 2차대전 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현재, 식민 지배 문제는 '과거'의 일이지 '현재'와 밀접한 관계가 없다. 그리고 자기 생활과 관계가 없으니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지킬 것은 자존심이고 정체성이다. 따라서 타협과 납득의 여지는 사라진다.
 
양국 정부와 정상간의 '미래지향적' 성명과 노력도 그것이 '현재'의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경우 사람들의 실제 의식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앞으로 일본이 식민 지배에 대해 명확한 방식으로 '사죄'하고 광범위하고 충분한 '배상'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활과의 관계에서 그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논의가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언제고 다양한 '반일적' '혐한적' 논의가 분출하여 이어질 것이다. '공통의 역사인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이상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니 그만 두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한일 사이에서 '과거'의 문제를 '현재'의 문제와 연계시켜 이해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 근접한 것은 양측이 국교를 정상화한 1965년이다. 국교가 없으면 양국간 사람들의 왕래나 경제활동에도 많은 장애가 있다. 국교 정상화는 양국 국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양국은 이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렸다. 양국 정부는 국교 정상화를 위해 '과거' 문제의 이해를 애매하게 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를 양국은 서로의 암묵적인 양해와 함께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 일본정부의 해석은, 대일본제국과 대한제국간의 일련의 조약이 이 기본조약에 의해 '무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의 발표는, 일련의 조약이 최초부터 '무효'였다는 해석이다.
 
언뜻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이다. 일본의 해석에 의하면 일본의 한국 병합은 국제법상 합법이고,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현재의 한국이 독립국임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한국의 해석에 따르면 한국 병합은 처음부터 위법이었고 따라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전체가 위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조약 해석은 양국의 '과거' 논의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과거'를 극복한 예로 드는 독일(당시 서독)과 폴란드의 경우를 비교하면 차이를 방치한 것이 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냉전의 두터운 벽을 사이에 둔 서독과 폴란드 사이에 정식 국교가 수립된 것은 한일보다 뒤진 1972년이다. 이에 앞서 1970년, 여기에서 부른 '화해의 의식'으로서, 당시 서독 수상 브란트가 관계정상화조약 조인을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희생자에 묵념을 드리고 무릎꿇고 사죄했다. 그 후 양국은 소위 역사교과서 회담으로 나아갔으며, 특히 폴란드 국민들의 감정을 푸는 데 이 '의식'은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침략했던 측인 서독이 분단국가였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된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불과 5년 후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고 유엔에 가입했다. 이에 대해 서독은 1970년이 되어도 통일문제와 국경문제를 안은 동독과 폴란드는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와도 국교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유엔 가입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서독에게 조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며, 폴란드와의 국교정상화는 스스로가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복귀하여 '보통국가'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었다.
 
동독이나 폴란드와의 국교는 2차대전 후 '철의 장막'에 의해 가족과 친구가 갈라진 사람들에게도 절실한 문제였다.
 
동서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동독에게 인접한 공산진영과의 관계정상화는 정치적, 경제적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화해의 의식'이 행해진 1970년, 서독은 소련과 영토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고, 1972년에는 동서독 교차승인에 이른다. 그 결과 1973년에 동서독은 유엔에 동시가입한다. 당시 서독에게 '과거'는 '현재'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하지만 한일간에는 그런 상황이 없었다.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양국민의 교류에도 장애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비자만 취득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양국 사이를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관한 논의는 점점 추상적이 되어 우리의 생활과 멀어졌다.
 
- 북일 교섭을 둘러싼 기묘한 생각
 
한일 사이의 기회는 잃었다면, 북일 사이는 어떻습니까? 앞서처럼 이야기하면, 북한과는 아직 국교가 없으니까 이 기회를 살려 '과거'를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북일 교섭은 일본과 한반도가 '과거'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하는 최후의 귀중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런 사람중에는 당사자인 일본과 북한 외에 한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한국의 역사연구자는 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역사연구로 북한의 교섭을 도우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이 일본과의 국교회복교섭에서 획득하지 못한, 식민 지배에 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북일 교섭이라는 '링'에서 실현하려 한다. 그 생각은 이런 것이다.
 
북일간에서 일본이 '사죄'와 '보상'을 하면, 한국정부는 남북 평등 대우를 주장하여 일본으로부터 '사죄'와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개정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한국측의 기대가 실제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50~60년대, 일본과 한국이 국교 회복 교섭을 거듭할 때, '과거'에 대한 판단이야말로 교섭의 최대 초점이었다. 당시는 식민 지배가 끝난지 10~20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로, 이승만 라인(평화선, 1952년에 한국이 설정한 외국어선 진입 금지선)으로 대표되는 어업문제를 제외하면 양국간의 현안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식민 지배는 젊은 시절에 실제로 경험한 '현실'이었고, 어느정도 실감과 중요성을 갖고 존재했다.
 
그러나 전후 반세기 이상 지난 현재, 일본의 식민 지배는 일본과 한반도에 거주하는 전후세대에게는 나중에 배운 '과거'의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북일 사이에는 납치 문제나 핵무기 문제 등 예를 들 것도 없이 '현실'의 생활에서 실감나게 느껴지는 문제가 산적해있다. 만일 국교 정상화 회담이 타결되어도 거기서 '과거'의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의 일본인은 북일교섭에서 납치문제나 핵무기문제 등과 비교해 '과거'문제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북한은 '현재'의 생활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존재이고, 이 나라와 국교를 맺기 위해 일종의 타협, 그것도 '일본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타협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사이에서 '과거'에 대한 공통인식이 형성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언론이 엄격히 통제되고 또 나름의 여러 문제점을 안고있는 북한은 더할 것이다. 그들에게 '과거'문제는 일본에게서 양보를 이끌어낼 사실상 유일한 카드이고, 북한 정부가 정말로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려 한다면 언젠가는 버려질 카드임이 틀림없다. 그 시점에서도 북일 사이에 '과거'문제로 진지한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일 수교는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과거'를 둘러싼 논의에 큰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식민지배는 '과거'의 일이 되었고, 국민적인 '화해의식'을 행할 기회도 멀리 지나갔다.
 
기형적으로 식민지배가 종료된 이상,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다른 구 종주국과 식민지간 관계처럼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제 일본과 한반도의 말하자면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관한 문제가 일종의 방법으로 해결가능하다고 안이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거'와 거기 얽힌 논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좋든 싫든 한반도는 이웃에 있고, 우리는 날마다 그들을 만나며 지낸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과거'를 끌고 가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그들과 가능한 한 원만히 지내는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를 피해가는 것도 아니며, '교류에 의한 해결'이라는 마법을 믿고 개인들에게 맡긴 채 그냥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 얽힌 합의 없이 한일이 이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쌓았다는 실적과,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갖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냉정히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한반도의 '과거'는 일본 식민 지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식민 지배 종료 후 반세기 이상 우리가 한반도의 사람들과 함께 쌓아온 또 하나의 '과거'와 그 무게에도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