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10일에 썼던 글입니다.)
일본이 보는 한국
※ 이 글은 기무라 칸(木村幹)의 <한반도를 어떻게 볼까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를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중의 '조선반도', '북조선', '일한', '일조'는 각각 '한반도', '북한', '한일', '북일'로 옮겼으며, '조선', '조선인'은 1945년 이전을 지칭할 경우는 그대로 '조선', '조선인', 그 이후일 경우는 경우에 따라 한국, 한반도, 한국인 등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일본내 사정에 정통하지 못하며, 이 책은 일본 내 한국 논의를 대표하는 책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탈고정관념'을 표방하는 저자가 제시하는 '제3의 시각'이 무엇인지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의견이나 보충 설명 등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꺼리지 않고 달아주시면 모두에게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4. 제4연습 - 한민족은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가?
- 한반도에 대한 '상식'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암묵적 전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소에 의심하지 않던 '상식'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왕 의심할 바에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상식이 좋다.
그런 '상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에게 물어보자.
글쎄요. '한반도의 사람들은 민족의식이 강하고 민족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같은 걸까요. 일본 식민 지배기의 민족운동과 최근의 반미운동 등을 보면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활발히 민족을 위해 운동한다. 이것은 일견 당연해서 의심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상식인 동시에 세계의 상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아래는 어느 미국 칼럼니스트가 쓴 글이다.
오마이뉴스가 작년 여름 미군 차량에 의한 두 소녀의 사고사를 보도하자, 그 사건을 경시하던 주류 미디어도 그것을 보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고 후의 항의 시위는 미국에 대한 전국규모의 분노로 발전하고, 강한 민족의식이 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실제로, 한국과 북한 사람들이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우리 주위에 무수히 존재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위의 '반미시위'나, 교과서 문제 등에 따라나오는 반일감정이 있다. 북한에서도, 관제인지의 여부는 뒤로 하고, 같은 형태의, 아니, 한국보다 훨씬 조직화된 대규모 운동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때로 만나는 한국인들도, 오늘의 평균적인 일본인과 비교하면 훨씬 강한 민족의식과 자부심을 가진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래서는 '상식'에 설득당할 뿐이다. 상식을 의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단순한 사실에 비춰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식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상식의 어딘가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아래의 연표를 보자.
한반도에서 근대 이래의 주요 민족운동
1895년 제1차 의병운동(대일)
1906년 애국계몽운동(대일)
1907년 제2차 의병운동(대일)
1919년 3.1 운동(대일)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대미, 대소)
1958년 재일조선인 북송 반대 운동(대일)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대일)
1982년 제1차 교과서 문제(대일)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대미)
1991년 종군위안부 문제(대일)
1998년 반 IMF 운동(대미, 대 세계화)
2001년 제2차 교과서문제(대일)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대미) |
위 연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 최근 100년은 '격렬한' 민족운동으로 채색된 시대같다. 하지만 이런 '격렬한' 민족운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 식민 지배기, 나아가 그 이전의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한반도 사람들은 승리하지 못했다. 한반도가 일본에서 해방된 것은 그들의 저항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이 패배하여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결과이다.
전후 20년이 지나 한일이 국교를 맺은 1965년의 소위 한일기본조약과 그 굴욕적인 내용에 대한 항의운동도 조약 내용을 바꾸지는 못했다.
반미운동에 이르면 이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으며 전개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즉시 독립을 요구했으나 미소 양대국의 힘에 눌렸다. 80년대의 무역마찰과 민주화 운동에 얽힌 반미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활발한 민족운동이 눈에 띌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 아시아 통화위기 중에 진행된 반미·반세계화 운동으로 진행된 반 IMF 운동은 일시적으로 왕성했으나 불과 몇 개월 뒤 급속히 침체했다. 그 뒤 한국은 정반대로 'IMF 우등생'이 되었다. 반미, 반세계화를 높이 외쳤던 마하티르 수상의 말레이시아는 물론, 한국보다 훨씬 생활수준이 낮고 빠른 국제 지원이 필요했던 타이나 인도네시아조차 한국만큼 철저히 IMF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2002년, 미군 차량에 의한 여중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강력한 '반미시위'를 배경으로 등장한 노무현 대통령조차, 대통령 취임 후 최초의 방미에서 서둘러 한미동맹의 기본구조를 바꾸지 않을 것을 명백히 했다.
2004년 2월에는 국회에서 이라크 추가파병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 다음 규모의 파병이고, 한국은 여기서도 미국에 중요한 동맹국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나 교과서 문제같은 '진행중'의 문제를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 한반도의 민족운동은 그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목표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강한 민족의식을 지닌 한반도의 사람들이 벌인 '격렬한' 민족운동은 대부분 도중에 힘을 잃은 결과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 '격렬한' 운동과 '격렬해 보이는' 운동
그건 역시, 일본과 미국이 그 강대한 군사적·경제적 힘으로 한반도 사람들의 운동을 억압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서 말했듯, 한반도의 두 나라는 세계의 '작은' 존재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무력하지 않다. 그것은 독립 직후의 베트남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한반도처럼, 아니 그 이상의 힘으로 베트남 민족운동을 탄압하려 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내면서도 전쟁에서 끝까지 싸워 통일과 해방을 쟁취했다.
대개 민족운동이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때문에 사람은 때로 이해와 승산을 벗어나 '민족을 위해' 죽기도 했다. '억압당해서 운동이 좌절됐다'라는 말은 분석로는 맞을지 몰라도 민족주의자의 말은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경제상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따위의 이유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긴 해도 민족주의자로서는 큰 문제가 있는 말이다. 그것은 '민족의 자존심보다 생활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민족은 민족의식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민족운동은 확실히 존재하고, 그 점에 있어서 사람들의 생각은 옳다. 하지만 그런 한반도의 민족운동이 세계 다른나라와 비교해서 특별히 강력했다고 말할 수는 없고, 때문에 한반도 사람들은 그 '강한' 민족의식과는 꽤나 거리가 먼 결과를 남기게 된 것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활발히 운동한다 - 이 고정관념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딘가에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 살펴보자. 아래 표는 1908년을 정점으로 전개된 제2차 의병운동에 관한 것이다.
제2차 의병운동 사망자 수
|
한반도 |
|
일 |
본 |
|
|
의병 |
수비대 |
헌병 |
경찰 |
합계 |
1906년 |
82 |
0 |
0 |
3 |
3 |
1907년 |
3,627 |
28 |
1 |
0 |
29 |
1908년 |
11,592 |
49 |
12 |
15 |
76 |
1909년 |
2,374 |
10 |
12 |
3 |
25 |
1910년 |
125 |
0 |
4 |
0 |
4 |
1911년 |
9 |
0 |
0 |
0 |
0 |
합계 |
17,809 |
87 |
29 |
21 |
137 |
사망자 수는 1만 7천명 이상에 이른다. 그것이 격렬한 운동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표에서는, 이 시기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이 극히 단기간에 집중돼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겠지만, 잠시 참고 다시 아래 표를 보자. 이것은 역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상황이다.
일본군의 대만 점령과정에서 대만측 사망자 수
|
체포나 호송 중 저항에 의한 자 |
재판 결과 에 의한 자 |
토벌대에 의한자 |
합계 |
1898년 |
166 |
84 |
2,850 |
3,100 |
1899년 |
324 |
507 |
3 |
834 |
1900년 |
468 |
873 |
9 |
1,350 |
1901년 |
682 |
997 |
311 |
1,990 |
1902년 |
4,033 |
537 |
106 |
4,676 |
합계 |
5,673 |
2,998 |
3,279 |
11,950 |
대만이 일본 영토가 된 것은 1895년이다. 표가 1898년부터 시작하는 것은 단지 그 이전은 정확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 인구는 한반도의 약 4분의 1이다. 대만의 희생자 1만명은 한반도의 4만명에 해당한다. 덧붙여, 표에 없는 1895년부터 3년간은 보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니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아진다. <일본 식민지 탐방>이라는 책은 1896년 4월까지의 대만측 희생자를 약 1만 7천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보통의 생각과 반대로, 한반도와 대만 중 식민 지배 초기에 더 격렬한 저항으로 일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대만이다. 대만에서는 일본의 영유 직후부터 격렬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어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1만 명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그 수는 대만을 영토로 하게 된 근거인 청일전쟁에서의 희생자 수를 넘는다. 반면 한반도에서 이런 저런 사건을 합쳐 일본군 희생자는 수백 명을 넘지 않으니, 대만에서의 저항이 얼마나 격렬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운동은 한반도에서는 좌절하고, 대만에서는 강하게 계속됐다. 이것은 한반도의 민족운동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끝난 원인이 '무자비한 탄압'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제2차 의병운동은 단기간에 번졌다가 급속히 침체했다. 사실 한반도의 많은 민족운동은 비슷한 경과를 거쳤다. 아래 표는 3.1운동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도 또다시, 운동이 얼마나 짧은 기간에 급속히 확대되고 진압되었는가를 볼 수 있다.
3.1운동 참가자 및 사상자 수
기간 |
운동참가자 |
한국측 사상자 |
일본측 사상자 |
3.1~10 |
60,395 |
286 |
27 |
11~20 |
68,722 |
114 |
17 |
3.21~31 |
144,322 |
243 |
42 |
4.1~10 |
179,681 |
516 |
49 |
11~20 |
9,733 |
40 |
5 |
21~30 |
233 |
0 |
1 |
계 |
463,086 |
1,199 |
141 |
한반도에서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끈질기고 강한 운동'을 전개해왔다는 일반의 이해는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의 인구 대비 희생자 수나 적(일본)에 가한 타격의 정도는 다른 나라의 비슷한 운동과 비교해 특별히 많다거나 강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다.
억압이 가해지자 비교적 단기간에 운동이 약해졌다는 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민족운동은 오히려 건조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한반도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의식을 갖고 있기에, 운동의 정점에서는 커다란 참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일시적인 거대한 모습에서 이 나라의 민족의식은 '강한' '격렬한' 것이라고 일반에는 이해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형태의 저항은 어떤 이유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고, 그 결과 적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 소국의식과 민족운동
그렇지만, 최소한 제가 만난 한국인은 모두 강한 민족의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반도 사람들의 민족운동이 건조해서 포기가 빠르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신이 생각해온 것과 일치하지 않는 자료가 나왔다고 해서 '그러니까 모든 것이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 이런 다른 두 개의 자료가 동시에 존재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민족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 이것은 틀림없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여기 저기에 모인 대군중을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듯, 풍요로운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조차 동세대의 일본인에 비해 훨씬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있다. 그런데 그들의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그것에 의한 운동이, 그 마음에 걸맞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사실은 하고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린다. 그 이유로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실은 마음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실현하고 싶은 소원이 있어도 그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면, 온갖 시련을 견디고 계속해서 노력히기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민족운동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은 아닐까. 일본으로부터 '과거'에 대한 사죄를 받거나,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나아가 민족의 비원인 남북통일.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은 민족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위한 운동이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엄연한 소국이고, 문화적으로는 우수해도 군사력과 경제력 등 물리적인 힘에서는 (최소한 지금 시점에서는) '강대국'에 큰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인식한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논설을 발견하기는 쉽다.
미국이 세계전략을 추진하듯이, 한민족에는 생존과 번영, 역내의 평화를 위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중략)...약소국이 일국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장애는 피해있으면 되는 것이고, 남북이 일괄타결할 수 없는 것은 부분적 합의를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가면 되는 것 아닐까.(중앙일보, 2001.4.2)
그들은 운동이 있는 시기에는 자신들이 세계의 '강대국'에 뒤지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운동의 정점에서, 강대한 세력에 아직 억압되지 않을 때 외쳐지는 그 주장은 희망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자신들이 자유로울때 자신의 소망을 외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기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을 묻는 것은 그 사람이 고난에 처했을 때이다.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민족의식과 '소국'의식이 함께있다. 민족의식은 그들에게 '민족을 위해 싸우자, 일어서자'고 호소한다. 하지만 동시에 '소국'의식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무모한 싸움은 오히려 민족을 파멸시킬 뿐이다. 냉정을 되찾고, 굴욕을 참더라도 국제사회와 협조해야한다'라고.
바로 그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모한 '도박'에는 나서지 않은 것이다.
식민 지배기의 저항운동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특별히 강한 것이 아님은 이미 얘기했다. 반일과 반미 두 개의 경향을 가진 독립 후의 한국은 결국 그 일본과 미국을 최대의 우방으로 해서 현재까지 지내왔다.
북한 역시 한국의 미일에 해당하는 나라로 중국과 소련이 있다. 북한은 자신의 후원국이라 할 수 있는 두 나라에 대해서 때로는 민족적 불만을 쏟아놓더라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국전쟁시에는 김일성이 사전에 스탈린과 모택동과 긴밀한 의견 조정을 거쳤다.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문제가 터진 2002년 이후에 있어서도 북한은 유일한 우방인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여러 민족주의적 주장을 제기하면서도 마지막에서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후견국인 '강대국'이 제시하는 선에서 타협한다. 식민 지배부터 해방후, 냉전의 최전선이라 할 가혹한 환경에 있으면서 한국과 북한이라는 두 나라가 이제까지 살아남은 배경에는, 민족의식과 '소국'의식의 공존이라는 독특함이 있는 것이다.
- 실현 불가능했던 자력으로의 해방과 민족의식
그러면 한반도 사람들은 민족의식과 '소국'의식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입니까? 자기 민족을 사랑하면서 민족에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뭔가 모순으로 생각됩니다.
민족주의의 한 특징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우리 민족은 위대하다'라거나 '세계 속에서 특수한 가치가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싸울 때는 그 무언가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민족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은 자기희생을 바칠만한 위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한반도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소국'이라고 생각하는 것 - 자기들은 국제사회에서 약한 입장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민족주의의 특징과 모순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때로 양자의 모순에 직면한다.
그런 그들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1997년 통화위기 이후 한국의 논단 일부에서 활발히 진행된 '강소국'에 관한 논의이다. 경제발전을 이룬 지금 무엇을 목표해야 할까. 그들은 그 목표의 하나로 '강소국'을 든다.
<월간조선>은 이 '강소국'에 대해 특집을 꾸미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인구 약 4800만의 한국을 '소국'으로 분류하기 위해 잘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인구와 국민소득으로 대중소와 강중약(분류 기준은 인구 1억 이상이 대국, 5천만 이상이 중국, 그 미만이 소국, 1인당 국내 총생산 15000달러 이상이 강국, 1만달러 이상이 중국, 그 미만이 약국)으로 분류하면 세계 모든 나라를 9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월간조선> 2001년 11월호)
그들은 말한다. 한국은 극동의 소국이고, 어느정도 경제발전을 했어도 미국과 중국같은 '강대국'이 될 수는 없다. 그런 한국이 목표해야 할 것은 경제적으로는 '강한', 큰 정치적 양형력을 갖지 않은 '강소국'이고, 그 예로 스위스나 핀란드가 거론되고 있다.
인구 4800만을 자랑하는 한국을 고작 인구 500만에서 700만 정도인 유럽 국가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는 여기서 묻지 말자. 중요한 것은 '강해져도 역시 소국이다'라는 주장에, 그들의 뿌리깊은 '소국'의식이 보이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근대 이래 한반도 민족주의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인 동시에,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좌절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좌절과 고민을 통해 그들의 민족의식은 항상 자극받고, 사람들은 뒤이은 운동으로 이끌려왔다.
한반도 민족주의 역사에서 최대의 좌절은 항일운동이었다. 앞서 말했듯, 일본이 식민지를 포기한 것은 식민지의 저항운동 때문이 아니라, 2차대전에 패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연합국이 선언한대로 식민지를 포기한 것에 불과하다.
'한반도의 강력한 민족운동'이라는 고정관념에 덮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실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확실히 해방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마음과는 달리 그것은 자기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주어진 해방'에 대한 불편함을 어느 한국 지식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은 이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 선전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을 마치 자신들이 보내준 것처럼 해서 가로채기 위함이다. 그건 거짓말이다. 만약 그들이 미리 알았다면, 그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왜 8월 14일까지 얌전히 복종했던 것인가. 그때 한마디라도 예고해서 민중을 위로하고 용기를 이끌어냈더라면, 지금에 와서 그렇게 선전하지 않아도 민중은 지도자로서 맞이했을 것이다.
알았냐 몰랐냐는 그만두고, 믿었던 사람도 없었다. 믿었다고 하면 무지한 민중이 무지하므로 선뜻 믿었던 것이다. 학식이나 있고, 밥이나 좀 먹고, 옷이라도 말끔히 입는 것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믿고 있었다면 어찌 그정도로 비겁하고 분별이 없었던 것인가. 한 사람의 간디가, 한 사람의 마치니가 있었던가. 몰랐다, 믿을 수 없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면, 그렇게 받았다면 기쁨도 배가 되지 않았겠는가.(함석헌, <고난의 한국민중사>)
민족운동의 좌절이 다음의 민족 운동을 자극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의 민족의식과 '소국'의식의 기묘한 조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족운동에서 목표했던 바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다음 세대의 후회-한(恨)-을 남기게 되었다.
이렇게 한반도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민족운동이 좌절될 때마다 하나씩 '한'이 쌓여간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풀기 위해 민족운동으로 얻을 수 없는 승리의 대체물을 구하게 된다.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에서 한일전과 북일전, 나아가 남북간 경기에 열광하는 것은 그때문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실제로는 얻을 수 없는 식민지배하 일본에 대한 승리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남북통일의 모습을 본다. 한국 스포츠 신문이 야구나 축구 시합을 '과거'에 빗대어 논하는 것은 드물지 않다.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약진에 열광하는, 거리를 가득 메운 대군중. 그들은 거기서 '강대국'이 된 한국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대체물은 어디까지나 대체물. 바로 그때문에 그들의 '한'은 한층 깊어지고, 언제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민족의식과 '소국'의식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사람들 속에 하나가 되어 그들의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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