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잡기장2016. 2. 3. 06:11

우리 사회의 웬만한 문제는 대부분 결국은 법원으로 온다. 그게 고소·고발이 됐든, 민사 소송이 됐든 뜨거운 이슈는 어떤 형태로든 법정에서 다뤄진다. 대법원의 판결은 그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갖는 최종 결론이 돼야 하지만, 사실 판결이 나도 논란이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패소한 쪽은 사법부를 비난하며 논쟁이 계속되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런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법률 해석 자체가 정답이 없기 때문 아닐까 싶다. 국내 최고의 법률가들이라 할 대법관들조차 같은 사안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법률적 판단이란 많은 경우 서로 충돌하는 가치 가운데 어떤 가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쓴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창비, 2015)는 법적 판단이 결국 가치의 문제임을 잘 보여준다. 책은 김 전 대법관이 재임기간(2004년 8월~2010년 8월) 맡았던 전원합의체 판결 가운데 10건을 꼽아 소개하고 있다. 존엄사, 삼성 특검, 고등학교 종교 교육, 새만금 개발, 성전환자 성별 정정 등 당시 논란이 치열했던 판결이다.

 

이들 중 대법관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한 사건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다수의견 가운데도 결론은 같지만 논리는 다른 별개의견이 있고, 소수의견조차 둘로 갈리는 사건도 있다. 같은 사건을 같은 법으로 판단하는데 이렇게도 다를 수 있나? 김 전 대법관은 각각의 의견이 어떤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에 어떤 논리를 거쳐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됐는지 차분히 설명해준다. 사건마다 말미에 자신의 입장과 평가를 덧붙이긴 했지만 서술 내용은 객관적이다.

 

다만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야기를 담은 <지혜의 아홉기둥>같은 책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듯하다. 김 전 대법관의 책에는 이를테면 각 사건에 대해 대법관들이 처음에 어떤 의견을 갖고 있었는지, 토론 과정에서 어떤 의견이 오갔는지, 양측이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기법을 썼는지, 누가 주도적으로 토론을 이끌었는지, 그 결과 누가 어떻게 입장을 바꿨는지 등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역동적인 과정은 생략돼있다. 판결문은 이미 나와있는 거고, 그 안에서 다수의견은 어떻고 소수의견은 어떤 논리인지를 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지혜의 아홉기둥>은 기자가 쓴 책이다. 법관은 합의 내용을 공개할 수 없는 데다(법원조직법) 사건들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김 전 대법관이 토론 내용을 책으로 옮기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 책은 구조적으로 쉽게 풀어쓴 대법원 판결문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려웠던 셈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은 쉽고 유익하다. 법률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