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4. 9. 5. 01:05

"북한은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수 진영의 생각은 이렇다.

 

박정희 정부 때 통일원에 들어가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통일비서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전 장관의 생각은 이렇다.

 

"6.25 시절 북한, 70년대 위장평화 공세를 일삼던 북한은 이제 없다. 북한도 변했고, 변할 것이다."

 

북한은 세계 제일의 폐쇄 사회이고, 김정은의 머릿속을 뜯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건 애초에 해결이 불가능한 논쟁이다. 다만 정 전 장관이 무슨 근거로 북한이 변했다고 말하는지를 <정세현의 통일토크(2013, 서해문집)>를 통해 살펴볼 뿐이다.

 

1. 우리가 퍼준 쌀이 핵무기로 돌아왔다?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이라 널리 퍼져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도 공식 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진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대북 지원액은 연간 3천억 원 수준. 북한은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들과 거래하면서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다. 미국 의회 입법조사국은 북한이 이란과의 무기거래만으로 연간 10억 달러 정도를 벌고 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p. 266). 남한이 준 쌀과 비료로 돈을 만들어서 핵과 미사일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대북 정보 부족을 자인하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게 정 전 장관의 지적이다(p. 267).

 

2. 아무리 대북 지원을 했어도 북한의 도발은 변함없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에 제2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북한을 믿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북한의 본심은 무엇인가?

 

사건 당일 남북 핫라인으로 "이번 사건은 평양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다. 책임자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확대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정식 사과편지도 곧 보낼 것이다"라는 요지의 연락이 왔습니다... 북한의 공식 사과 편지는 7월 25일 판문점을 통해서 왔습니다.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pp. 144~145)

 

그리고 실제로 이후 노무현 정권이 끝날 때까지 북한은 핵실험, 미사일 발사는 했지만 '대남' 도발은 하지 않았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는 커녕 인정도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물론 우리가 '뺨 맞고 사과받는 관계'와 '뺨 맞고 사과도 못 받는 관계'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건 비극적인 일이다. 애초에 '뺨을 안 맞는 관계'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햇볕정책을 지속했으면 남북이 '뺨 안 맞는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답할 듯하다. 보수 진영의 답은 '철저한 안보 태세로 뺨 때릴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가 될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북한의 대남 도발은 보수 정권 집권 때 더 자주 일어났지만, 이게 보수 측 논리를 흔들진 못한다. 이미 모범 답안이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더욱 안보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3. 통일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

 

김정일 위원장이 연방제가 언제쯤 될 것 같냐고 묻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곧 될 거요" 하겠습니까, "안 될 거요" 하겠습니까? 가만히 있었더니 자문자답을 하더래요. "그거 50년이 지나도 안 됩니다." (p. 128)

 

나는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이 현실적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적은 일이 있다. 정세현 전 장관도 똑같은 말을 한다. 통일을 지금 당장 기대할 수도 없고, 그 전에 적대관계부터 개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 대신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표현을 쓴다(pp. 224~225).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 전 장관은 교류와 협력 외에 답이 없다고 설명한다.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스스로 놓을 리 없는데 북한에 '변하라, 변하라' 외쳐봐야 소용 없고, 북한이 스스로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p. 295).

 

어떻게? 서독의 경우는 이랬다. "처음에는 현금 지원성 사업을 하다가, 동독의 대서독 의존성이 상당 정도 생긴 뒤에는 현물로 주기 시작했고, 의존성이 더 커진 뒤에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신문 방송 개방, 체류기간 연장 등의 조건을 달고 지원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동독 사람들의 대서독 의존성이 커지면서 결국 동서독의 민심이 연결됐고, 그것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동력이 된 것입니다."(p. 257)

 

우리의 대북 지원도 효과가 있었다. "한때는 서해상의 남북 함정끼리 NLL을 사이에 두고 우호적으로 무선 교신도 했습니다. "당신들 어선이 지금 경계선을 넘고 있다. 빨리 올려보내라!" "알았다. 바로 조치하겠다." 그런 협조를 끌어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쌀과 비료였습니다. (p. 270)

 

이명박 정부 이후 이런 교신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그렇게 남북 관계가 꽉 막힌 상태에서 갑자기 제기된 '통일 대비론'의 본심은 결국 북한 붕괴론이라는 게 정 전 장관의 설명이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론'은 어떨까? 지난 정부처럼 남북 관계를 단절시킨 건 아니지만, 진보 정권의 대북 정책을 '잘못된 관행'으로 보고 '북한의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같다. 자존심 센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정세현 전 장관도 '통일은 남는 장사'라고 얘기한다는 거다. 젊은 세대를 포함해 워낙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무관심하다보니 나온 말일 게다. 물론 단순히 민족주의적 낭만으로 통일을 추진할 수는 없고, 통일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는 면밀히 따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통일을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면, '남북 통일로 연간 9.25%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실제로 실현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의 실망감을 여간해선 다독이기 어려울 것이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