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3. 6. 9. 22:49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지가 있는가? <게임의 종말>(한울아카데미, 2010)의 책 표지에서부터 저자 이용준은 이렇게 묻는다. 저자는 참여정부 때 KEDO 사무국 근무에 이어 북핵 담당 대사, 6자 회담 차석대표를 지내며 북핵 문제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외교관이다. 이런 전문가의 판단은 어떨까? 외교관답게 단정적인 표현은 쓰지 않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대답은 분명하다. '북한은 핵 포기 의지가 절대 없다.' 20여 년에 걸친 북핵 협상은 잘못된 기대 때문에 악순환에 빠져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MB정부 출범 때 외교분과 인수위원으로 참여했고, 외교부 차관보까지 지냈다. 북한 문제에 대해선 강경 '네오콘' 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하고 치부하기엔 저자의 판단에 상당한 근거가 있다.


저자는 북한의 핵 보유가 안보 위협 때문이라는 진보 진영의 주장부터 해체한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처음 시작된 건 1970년대 후반. 공산진영의 기세가 등등했던 시기였다. 북한에 안보위협 따위는 전혀 없었다(p. 21). 또,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건설하기 시작한 98년도 북미관계 개선, 남한의 햇볕정책이 본격 추진되던 시기였다.


그 동안의 북한 핵협상 역사를 돌아봐도 북한의 핵 포기 의지는 의심스럽다. 북한은 핵폐기 과정을 잘게 쪼갰다. 동결-불능화-신고-검증-폐기의 단계로 나눠 각 단계마다 대가를 요구했다. 단순히 현상유지에 불과한 '동결' 조치만으로도 상당한 지원을 얻어냈다. 하지만 이런 건 얼마든지 취소하고 되돌릴 수 있는 단계였다. 핵 폐기를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인 검증 단계를 북한은 결코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핵을 포기할 뜻이 없다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저자는 핵 보유의 비용이 효과보다 크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북한의 돈줄을 바짝 죄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북한 정권에 막대한 현금을 공급해온 대북 지원이나 남북 경협 사업은 북한의 핵 포기 의지가 확인될 때까지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야말로 남한의 대북 협상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p. 283).


과연 MB정부는 5년 동안 모든 남북 관계를 단절시켰다. MB 정권은 민족사의 죄인이 될 거라느니, 북한을 중국의 식민지로 넘기고 있다느니 하는 비판에도 대북 제재 기조는 꿋꿋했다. 그렇게 정권이 바뀌고 북한은 이제 다시 대화를 제의했다. 5년에 걸친 대북 제재의 효과일까? 의제도 포괄적이고, 북한의 자세도 적극적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남북 교류가 재개될 때다. 북한 핵 문제는 아직 뚜렷한 해결 기미가 없는 상태다. 6자 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북한이 진정한 핵 포기 의지를 갖고 있는지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전에라도 김정은 정권에 현금을 안겨줄 남북 교류를 시작해야 할까? 이미 미국 언론들은 박근혜 정권이 남북 경협 사업을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좀  있으면 한미 공조가 삐걱거린다는 판에 박힌 위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남북 교류와 핵 문제를 연계시키면 민족 화해를 내세운 북한에 명분을 내주고, 국내에서도 'MB와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될 거다. 현 정권은 이런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비핵화라는 것 자체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정책이 효과를 거둘지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과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앞으로 그저 그런 정도의 남북 교류가 이어지면서, 북한은 그저 그런 정도의 핵무기를 갖고, 그저 그런 정도의 북미, 북중, 북일 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책은 한 번 읽어볼 만하다. 대북 온건론자들의 주장이 너무 희화화된 부분(이를테면 PSI 참여문제)이 없지 않지만, 보수 진영의 대북 인식과 정책론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플루토늄탄과 우라늄탄의 차이가 뭔지, 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위험한지 등의 기술적 문제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으니, 현직 외교관이 쓴 책이라고 숨겨진 뒷이야기 같은 걸 기대하진 말자. "이 책에 기술된 모든 사실들은 이미 공개된 사항들이며, 이 책의 어느 부분도 미공개 정보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p. 13)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