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10. 22. 12:50
대단하다. 검찰의 칼날이 시시각각 주변을 조여오는 상황에서도,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고민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안타깝다. 그토록 진정성 가득한 질문들에 미처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게.

그리고 남은 원고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문제의식을 풀어놓은 것이니 당연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저곳에서 모순이 보인다.

책을 통틀어 노 대통령은 진보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사실 '진보'라는 가치는 1차원 스펙트럼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정치·문화적 보수주의-자유주의의 대립항이 있고, 거기에 경제적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의 대립이 더해진다. 여기다 우리나라에선 남북 관계가 포함돼 냉전주의-대북 포용주의의 대립이 추가된다.
 
여기서 DJ와 노무현의 위치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정치적 자유주의(진보), 경제적 자유주의(보수), 대북 포용주의(진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두 정권을 진보 정권이라 부를 때는 시민권과 대북정책을 감안한 경우일 텐데, 이들의 경제정책까지 진보의 범주에 포함하려다보니 민영화나 규제완화, FTA같은 쟁점은 진보적 가치와 무관하다는 무리한 주장까지 나오게 된 거 아닌가 싶다.

사실 책에서 노 대통령이 가장 아프게 반성하는 부분은 노동 유연화를 수용해버렸다는 건데, 정리해고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민영화, 파견과 비정규직을 급증시킨 규제완화,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아래 근로 조건을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한미FTA와 노동 유연화를 따로 떼고 생각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또한 노조의 몰락은 기술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적, 제도적 탄압 때문이라는 폴 크루그먼의 견해를 소개하면서도(p. 66),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이념의 과잉으로 몰락했다는, 대책없는 요구를 하고 싸운다고 진단했는데(p. 99, 125, 252), 사실 노무현 정권 기간 동안 노조가 요구한 것중 그렇게 급진적이었던 게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미 FTA 반대 정도같은데, 찬반 여부를 떠나서 대외 협상에 대한 반대 시위는 강하면 강할수록 협상력을 강화시켜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고...

진보의 전략을 위해, 교육의 기회 균등을 위한 공공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p. 269),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 모두 잘 사는 세상이 되는 건 아니고, 그러려면 '전부 넥타이 매고 일하는 사람만 사는 동네가 된다는 가정이 있어야'(p. 266) 하니 답이 안 나온다는 건 노 대통령 스스로 하는 얘기.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자는 건가... 완성되지 않은 책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노 대통령 자신도 답이 없다.
 
분배, 다시 말해 복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방향만 남기고 떠나버렸는데, 그래서 노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고, 또 한편으론 이런 고민은 대통령 되기 전에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든다.

다만 '반MB' 만이 요구되는 것같은 요즘 분위기에서, 노 대통령의 이런 마지막 말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거냐에 대해서 과거 반독재 구호처럼 한 개인을 타도하는 것, 한 세력을 타도하는 것, 그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고 다음 세기를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 체계가 중요한 겁니다.(p. 314)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