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11. 1. 17:09

'BBK 관련 판결 보도를 덮기 위해 서태지-이지아 이혼설이 터져나왔다'. 사건 당시부터 세간에 돌던 얘기다. 심심풀이 가십 거리나 술자리 안주로 나오는 말이라면 재미난 소재다. 하지만 '나는 꼼수다'의 인기가 크게 높아지면서 이게 무슨 정설인 것처럼 새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모든 음모론은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이같은 주장이 호응을 얻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방송 내용 중에 사실과 다른 것도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1. BBK 의혹 - '덮을' 가치도 없었다

우선 알아야 할 건 서태지 이혼 파문으로 '덮였다는' 판결이 무슨 대단한 판결이 아니라는 거다.

문제의 판결은 올해 4월 21일자, BBK 수사 검사가 시사인 등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거다. BBK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MB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도록 김경준을 회유·협박했다는 게 보도 내용. 근거는 김경준의 자필 메모와 진술이었고, 검사들은 허위 보도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거다.

1심 재판부는 시사인에 배상 판결을 내렸다. 검사들은 김경준을 회유한 적이 없었고, 김경준은 거짓말을 했으니까, 시사인은 허위 보도의 책임을 진다는 거다.

2심 판단은 달랐다. 김경준의 말이 거짓이더라도, 그가 그런 말을 하고 메모를 남긴 것 자체는 사실이다. 시사인은 거기 기초해 '김경준이 이런 주장을 했다'고 전한 데 불과하고, 따라서 허위 보도가 아니라는 거다.

(재판부는) "메모 등이 객관적 사실인지 명백하지 않더라도....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수사과정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한 이상,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뉴시스 보도 내용

다시 말하자면 시사인 등에 명예훼손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더라도, 그게 곧 검찰이 김경준을 회유했다고 사실로 인정한 건 아니고, MB가 BBK와 관련됐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라는 얘기다.

원래 언론 보도의 경우 기사 내용이 실제로는 사실과 다르더라도, 공익과 관련된 문제고 보도 당시 기자가 사실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면, 즉 나름의 근거를 갖고 확인 과정을 거쳤다면 명예훼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게 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문제의 판결은 하등 특이할 게 없는 내용이었고, 사실 MB에게 별 타격도 되지 않는다. 스타일 구긴 건 검찰일 뿐이다.

이 판결의 의미라면 언론기관이 갖는 표현의 자유를 보다 폭넓게 인정해줬다는 것, 딱 거기까지다. BBK 의혹에 대해 기존과 다른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의혹을 확인해준 것도 아니다. 서태지 이혼 파문이 없었더라도 이 판결은 그렇고 그런 법원 판결 기사의 하나로, 사회면 2단이나 3단 정도로 단신 처리됐을 거다. 이런 걸 덮자고 뭔가를 새로 흘릴 바보는 없다.

2. 특종 기자는 있다

나꼼수에서 음모론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누가 특종을 했는지 불분명하다는 것. '특종을 주장하는 기자도 없고, 자랑하는 언론사도 없다. 후속 기사도 없다. 그날만 대서특필되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런 취지인데, 네티즌 사이에서 이런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면서 힘들게 특종을 따낸 기자는 얼마나 힘이 빠질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태지-이지아 이혼 소송 보도는 엄연히 <스포츠 서울>의 단독 기사다. 얼마나 큰 특종이었는지,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까지 받았다. 여기를 누르면 취재 기자의 수상 소감을 읽을 수 있다. <스포츠 서울>은 보도 다음날이었나, "본지, 서태지 결혼부터 이혼까지 올킬"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1면에 박아 자사의 특종 보도를 자랑했다. 1996년 서태지 결혼설 보도도 자사가 처음 보도했던 것을 되새긴 기사였다.

후속 기사도 쏟아졌다. 편의상 내가 일하는 YTN만 봐도 이혼 소송 쟁점 정리·네티즌 반응(22일), 서태지 동정·미국 법원 판결 내용(23일), 소송 취하(30일) 등의 리포트를 내보냈다. 전문가 출연까지 있었다. 서태지 이혼 보도 좀 그만 하라는 시청자 전화가 줄이을 정도였다. 하물며 인터넷의 수많은 연예 웹진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보도에서 누가 1보를 썼는지는 사실 언론계 종사자밖에 모른다. 언론계에 있어도 자기 출입처 아니면 모른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자세히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공개 방송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확신에 찬 어투로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아쉽다.

3. 흘리려 해도 쉽지 않다

흔히 또 사람들이 착각하는 건 검찰, 로펌, 정부, 이런 수많은 개인의 집합인 기관을 동일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 자신의 직장을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런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부서의 일이 아니면 잘 모른다. BBK와 이지아 모두 바른에서 대리했다고는 해도, 바른의 구성원들이 모두 두 사건을 알았다고 보긴 어렵다. 둘 다 같은 변호사가 맡은 게 아니라면.

바른의 내부 구조는 잘 모르지만, 설령 누군가 서태지-이지아 소송 내용을 알고 있었고 이걸 언론에 흘리려고 결심했다 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보도자료를 낼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은 아니고 사적으로 정보를 건네줘야 하는데, 아무 언론사나 전화해서 이름도 모르는 당직자에게 이런 고급 정보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결국 자신과 친하고 믿을만한 기자를 찾게 돼있는데, 그게 왜 하필 법조 출입 기자도 아니고 <스포츠 서울>이었을까? 더 유력하고 대중적 영향력도 강한 매체가 많은데.

위의 <스포츠 서울>의 수상 소감을 보면, 이 취재는 하루 아침에 된 게 아니다. 정확히 나와있진 않지만, 소장이 접수된 게 1월, 첫 변론 준비기일이 3월이었으니 최소한 한 달 이상은 걸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이지아 쪽 취재는 사실 이미 돼있었다. 마무리는 소송 상대방인 '정현철'이 서태지 맞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이건 바른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BBK 판결 보도와 서태지-이지아 이혼 보도 간격은 30분. 기사가 나가는 데엔 시간이 걸린다. 기사 작성과 편집, 데스킹부터 송고까지. 정보를 흘려줬다면 최소한 패소 판결이 선고된 뒤였을 테니, 기사를 써서 불러줬다고 쳐도 모자란 시간이다.

4. 언론 플레이는 있지만...

물론 기사를 죽이거나 덮으려고 정부에서 꼼수를 쓰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이를테면 불리한 내용은 금요일 오후에 보도자료를 내는 경우도 있고(토요일엔 다들 신문을 안 보니까), 어떤 언론사가 특종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먼저 관련 내용을 발표해버리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는 기자들도 왜 이런 자료가 지금 나오는지 다 안다.

정권 초기, 청와대가 실제로 홍보 지침을 세운 적도 있었다. 정부 반대 여론의 보도가 축소되도록 강호순 사건 등의 강력 사건 보도를 키우게 하자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5공 시절이 아니고, 이런 게 있으면 나중에라도, 주요 언론이 아니면 <미디어 오늘>같은 매체 비평지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공개되고, 실제로도 그랬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도 있다. 이를테면 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된 날은 2009년 4월 30일. 한나라당이 참패한 4.29 재보선 바로 다음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재보선 다음날 '여당 참패'같은 제목이 신문에 도배됐겠지만, 전직 대통령 검찰 소환이라는 초유의 사태 때문에 재보선 결과 보도는 크게 축소됐다. 물론 검찰이야 수사 일정상 잡은 날짜지 다른 고려는 없었다고 말하겠지만, 체포 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소환해도 큰 차이 없는 마당에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꼼수다'가 인기를 얻고, 언론 플레이에 관한 음모론이 설득력을 갖는 건 결국 사람들이 기존 언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하고 공정한, 핵심을 짚는 보도가 드문 현실에 대해선 일단 나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반 MB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 나꼼수를 들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크게 공감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 진짜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설득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 아닌가. "나는 MB를 지지하지만, 나꼼수에서 하는 말은 정말 맞다." 풍자와 유머에서 허용되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런 평을 듣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방송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