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명안 부결 소식으로 '멘붕'에 빠진 건 통합진보당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의원총회 결과를 듣기 위해 회의장 앞에 모여있던 기자들에게도 부결이라는 현실은 충격이었다. 표결 결과를 접하고도 선뜻 믿기지가 않아 많은 기자들이 한동안 기사를 송고하지 못했다. 1분 1초를 다투는 기자들이 그랬다.
- 부정과 부실 사이에서
무효표를 던진 건 '중립 성향'으로 분류돼 온 김제남 의원이었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빠져나간 회의장, 김제남 의원은 탁자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한참 뒤에 밖으로 나온 김 의원은 정치적 책임을 13명이 함께 나누겠다고, 당이 겪은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 당권파는 분노했다. 강동원 의원은 태어나서 이렇게 심한 배신감은 처음 느낀다고 일갈했고, 박원석 의원은 정치적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쯤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난 비례대표 경선 사태를 한 번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구 당권파는 왜 그렇게 격렬히 반발하는 것일까? 이석기 의원의 자진사퇴를 설득하기까지 했던 김제남 의원은 왜 막판에 마음을 바꾼 걸까?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과정이 부실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경선 부정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없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두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신 당권파조차도 '정치적 책임'을 요구할 뿐이다.
첫 진상조사에서 묶음채 붙어있던 투표용지가 발견된 건 부정 경선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처럼 보였다. '마른 풀이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했던 김선동 의원은 세간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런데 후속 조사에서 실험을 실시해보니, 겹쳐놓은 투표용지가 진짜로 다시 달라붙었다! 결국 후속 보고서는 뭉텅이 투표가 부정 경선의 결과인지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온라인 투표 시스템 소스 코드 변경 의혹은 어땠나? 역시 당의 후속 조사 보고서는 데이터베이스 변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다.
물론 조직 동원은 있었을 거다. 부문별로 지지 후보를 결정해 지시하는 이른바 '셋팅 선거'였던 것도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옛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오랫동안 활동해왔던 어느 누구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석기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1위를 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체가 부정 선거는 아니다. 각자 자신의 조직을 동원하는 건 어느 당, 어느 선거에서든 마찬가지다. 조직 동원을 문제삼기 시작하면 통합진보당은 물론 새누리당, 민주통합당의 그 어느 의원도 남아날 사람이 없을 거다.
한 구 당권파 관계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선거 관리가 부실했는데 왜 그 책임을 후보가 집니까. 강남을 선거구에서 미봉인 투표함 나왔다고 김종훈, 정동영 후보가 사퇴하나요? 부실 선거 책임은 선관위가 지는 거죠. 후보가 사퇴하는 건 거기 직접 개입한 의혹이 있을 때 아니겠습니까?"
- 중립파가 설 자리
물론 국민들이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여론은 이미 '통합진보당=부정선거당'으로 굳어져버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비례대표 후보 총사퇴 정도의 모습을 보여야 국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는 게 신 당권파의 주장이었고, 이걸 자신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로 해석한 구 당권파가 강공으로 맞대응한 게 지난 석 달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문제는 통합진보당의 당내 구도상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완벽히 제압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구 당권파는 그들의 이념이 진보적이냐, 바람직하냐를 떠나서 통합진보당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갖고 있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 게 지난 7.25 중앙위원회였다.
지난 당직 선거에서 신 당권파는 대표 선거를 빼면 모두 패배했다. 중앙위원회는 구 당권파가 박빙이지만 다수를 차지했고, 그 상급기구인 대의원대회는 확실한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들의 협조가 없었던 중앙위원회에서 신 당권파는 9시간 동안 안건 처리 순서조차 정할 수 없었다.
제명안 부결의 '원흉' 김제남 의원이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도 바로 이날 중앙위원회의 현실이었다. 어느 한 쪽도 타협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을 제명시키든 아니든, 당은 끝없는 갈등 속을 헤멜 수 밖에 없다.
원칙과 원칙이 맞붙으면 협상은 불가능하다. 사실 그 동안 여러 중재안이 나왔다. 제명 여부를 당원 투표와 여론조사를 섞어 결정하는 안, 이석기 의원만 제명하고 김재연 의원은 남기는 안 등이 나왔지만, 양쪽 다 원칙을 훼손하는 미봉책이라며 거부했다.
통합진보당 절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신 당권파만으로는 혁신할 수 없다는 김제남 의원의 판단은 옳다. 문제는 구 당권파와 함께 해도 국민이 원하는 수준의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것. 양측의 격렬한 대립 속에 '중립 성향' 의원이 설 자리는 없었다. 더구나 전후 상황을 볼 때 김 의원은 신 당권파 측에 최소한의 언질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 당권파는 오히려 처음부터 계획된 행동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제남 의원의 진심과 상관 없이, 그녀는 앞으로 구 당권파로 치부돼 한동안 비난을 감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제명안 가결과 네버 엔딩 스토리
하지만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안이 가결됐다고 가정해보자. 상황은 과연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구 당권파는 7.25 중앙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진상조사보고서 폐기와 함께 이석기·김재연 의원 복당 제한 폐지 안건을 들고 나왔을 거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중앙위원회는 구 당권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2박 3일쯤 걸린 회의 끝에 안건은 통과될 거고, 두 의원은 복당과 함께 재심을 청구할 거다. 그리고 또 지리한 논쟁이 이어지게 된다.
어찌 어찌 해서 중앙위원회에서 실패한다면 구 당권파는 상급 기구인 대의원대회를 소집할 거다. 그리고 또 똑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지난 석 달 동안 보아온 그림을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다.
- 진보의 한계 : '식물 정당' 통합진보당의 미래
이번 사태로 확인된 건 통합진보당 내에서 구 당권파의 입지는 좋든 싫든 굳건하다는 것,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는 당 지도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구 당권파와 타협을 선택하자니 명분이 없다. 어떤 이유를 내세워도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분당을 하자니 전망이 없다. 구 당권파와 결별한 진보신당의 실험은 이미 실패했다.
세력 대결로 부딪히자니 승산이 없다. 언론의 전폭적 지원과 당내 조직의 총력 동원 속에 치러진 지난 당직선거에서조차 구 당권파의 영향력은 확고했다. 노회찬·심상정같은 명망가의 경우 총선 전이었다면 차라리 민주당에 입당해 왼쪽 블럭을 형성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선 허황한 이야기다.
한 당 관계자는 한탄했다. "이제 끝났다. 대선 후보도 낼 수 없고, 당도 망했다." 어느 누구도 선뜻 수습책을 내놓지 못했다. 제명안 부결로 양측의 적대감은 극대화됐다. 하지만 당을 쪼갤 게 아니라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타협안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통합진보당은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당분간 한 지붕 두 가족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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