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8. 29. 21:11
(2004년 12월 7일에 썼던 글입니다.)


1. 민족과 민족의식
 
‘민족’이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있다. 그렇다,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그렇다, 한국은 그렇다, 등등. 그러나 민족의 ‘정치적 효과’에 주목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한민족이 단군의 후손으로 단일 혈통의 단일 민족을 구성하고 있든, 북방 유목민과 남방 농경민이 어우러져 형성되었든 별 관심이 없다. 설령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민족이라 하더라도, 민족의식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스스로를 ‘민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민족’이 무슨 ‘민족’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아득한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문화니 생활 터전이니 하며 오늘날 우리의 민족 의식을 수만 년 전으로 소급하지만, 실상 우리의 ‘근대적’ 민족의식은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백범일지>에 이런 한탄이 나온다. “조선 사람들은 도무지 무식해서 나라가 뭔지도, 민족이 뭔지도 모른다..”(지금 책이 없어 정확한 인용은 아니나 비슷한 의미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조선을 여행했던 외국인들의 기록도 “조선인들에게서는 일본인들과 같은 민족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적고있다. 그랬기 때문에 구한말 각종 신문과 학교를 통해 교육을 펼치던 개화 지식인들의 급선무는 ‘민족의식’의 고취가 되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3.1 운동을 전후로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역사가 민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역사를 만든다. ‘국사’는 민족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된다. 지금은 우리가 한반도를 단일민족으로 인식하는 사관에 익숙하지만, 만일 우리가 지금껏 일제 식민치하에 있다면 한국인과 일본인을 단일민족으로 보는 사관이 교육될 것이요(일본 국왕이 백제계라는 주장도 있는 판에 그런 사론쯤 못 만들 이유도 없다), 통일 지향이 사라지고 분단이 고착화된다면 한민족은 원래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뉜다는 사론이 나올 것이다. (물론 단일민족에 대한 우리의 강한 신념에 비춰볼 때, 이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하겠다)
 
즉, 민족은 민족의식의 산물이고, 민족의식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영원 불변의 사실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특수하게 나타나는 이념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물론, 짧게 잡아도 고려 4백년, 조선 5백년, 도합 근 천년을 동일한 정치 단위로 살아온 사람들간에 과연 아무런 의식도 없었겠느냐 하는 문제는 남는다. 나 역시 어떤 종류의 의식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모르겠고, 알아보려고 해도 뭐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해서 포기했다(좋은 자료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세요..). 확실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의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2. 저항적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무시하고 ‘민족주의는 재앙이다’라는, 자못 선정적인 제목을 달아서 지나가다님의 질타를 받았다. 이런 비판을 받을 것을 알면서 제목을 저렇게 달았던 건, 조회수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국수적 민족주의는 재앙이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재앙이다’라는 문장은 오늘날 고등학교 일반사회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어떤 민족주의든 ‘재앙’의 가능성을 의심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항적 민족주의의 발생은 사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억압과 수탈이 민족을 경계로 이루어질 때, 그에 대한 저항은 자연히 민족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민족의식이 형성된다. 이를테면 수단 다르푸르 지역의 주민들도 본래 ‘수단 국민’으로서의 정체성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최근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계속 되면서 ‘우리는 다르푸르 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민족이 구분의 핵심이라는 지적은 그런 면에서 올바르다. 그리고 타민족의 차별과 수탈로부터의 해방에 있어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당성과 진보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일단 저항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저항적 민족주의는 많은 한계를 노출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내부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억압한다든지 하는 일반적인 한계 이외에도, 그것이 보복이나 ‘민족의 발전’을 위한 공격적인 이념으로 변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코소보 계 주민들이 알바니아 계 인들을 보복학살한 것이나, 베트남이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 등을 볼 때, 민족주의의 위험성은 언제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광기가 시작되면, 그 때는 너무 늦다.
 
민족주의 비판이 우리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버 섞인 반응도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민족해방운동의 정당성은 그것이 ‘민족’해방운동이어서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이 강압적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던 한, 민족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정당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3. 연대의식으로서의 민족주의
 
민족주의의 정치적 위험성에 동의하면서도, 인정과 사랑의 연대의식으로서 민족주의를 옹호하시는 분도 있으시다. 그같은 지적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다만 그 연대의 대상을 ‘민족’ 바깥으로도 넓히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좁게는 국내에 거주하는 ‘비민족’들, 넓게는 외국의 다른 시민들과도 인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충분히 연대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어느 러시아 작가가 말했듯이,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인간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내 주변 사람들부터 사랑할 수 있도록 나부터 노력해야 할 것 같다.
 
4. 통일과 민족주의

아직 민족주의를 놓지 못하는 많은 분들의 이유는 통일일 것이다. 한 민족끼리 두 나라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통일에 가장 큰 당위성을 부여하는 민족주의가 해체되면, 그렇지 않아도 젊은 세대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회의 내지는 무관심이 퍼져나가고 있는 형편에 분단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통일만 이룩하면 진보인 것은 아니다. 통일 이후에도 우리의 인식과 사고가 분단 시대의 것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또다른 비극을 낳을 것이다. 만일 북한이 통일 한국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북한 주민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면! 그럴수록 강력한 민족주의가 필요하다 할 지 모르겠으나, 이미 같은 국민들인 남한 사람들 끼리도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는가.. 또한 통일 이후에도 현재와 같은 정치/외교적 구조가 계속된다면?
 
그러므로 통일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냉전 구조의 해체이고, 분단 의식의 해체이다. 막연히 ‘우리는 한 민족이니까’ 통일해야 한다는 감상적 통일관에서 벗어나, 분단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고, 한반도에 남아있는 냉전 구조가 우리의 입지를 어떻게 제약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짚어야 한다. 민족주의 없이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렇게 외칠 수 있다.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이다!’
 
5. 세계화와 탈민족주의
 
탈민족주의는 본의 아니게 세계화 논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국민경제의 해체와 통합 시장을 주창하는 자본의 논리는 일면 탈민족주의와 상통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탈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입장도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탈민족주의란 사실 이런 자본의 논리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탈민족주의란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은 무조건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입장을 떠나 보다 더 넓은, 보편적 관점(아마도 인권, 민주주의 같은..)에 서자는 것이다. 세계화의 논리가 자본과 강자에만 이득을 주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고 인식한다면, 탈민족주의와 반 세계화는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탈민족주의의 원조는 좌파가 아니었던가.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주장했던. 세계화의 논리에 이용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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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