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30. 21:26
(2006년 8월 17일에 썼던 글입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결국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그것도 광복절에. 이에 대한 규탄은 우리 외교부부터 시민단체, 블로거, 외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해줬으므로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는, A급 전범의 합사문제를 짚어보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물론 태생부터 역사인식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 곳이다. 그들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미화하며 전쟁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그 신사에 A급 전범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A급 전범의 분사나 대체추도시설 건립이 거론된다. 특히 A급 전범 분사는 일본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제안되고 있으며, 중국도 A급 전범이 분사된다면 야스쿠니 참배를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공식 발표를 찾지는 못했지만 우리 정부도 비슷한 입장일 것으로 생각된다. 언론에서도 A급 전범 분사를 환영하는 편이다.


중국 정부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 최근 외교경로를 통해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을 참배 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7일 보도했다.(경향신문 2001년 8월 8일자)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 참배를 비난하는 것은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총리는 참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나, 외부에 대해 '언젠가는 이해해 줄 것이다'라고 할 뿐,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도 없다.(아사히 신문 2004년 1월 4일 사설)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경단련(經團連)의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회장은 26일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A급 전범’을 분사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정기총회 후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A급 전범을 참배하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제안했다.(동아일보 2005년 5월 28일자)

중요한 것은 일본정부의 올바른 역사인식인 만큼, 우리정부는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총리가 사적이든 공적이든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외교통상부 논평, 2004년 4월)

A급 전범 분사론이 활성화하는 것은 일단 환영할 일이다. 분사론은 국제적 논란을 낳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대안의 성격이기 때문이다.(경향신문 2006년 6월 2일 사설)



즉,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A급 전범이 합사돼있기 때문이며, 바꿔 말하면 A급 전범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면 야스쿠니 참배는 문제가 없다는 말도 된다.


* A급 전범은 극동군사재판소헌장 5조 a항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를 위반한 혐의로 처벌된 사람들을 말한다. B급 전범은 b항 '전쟁범죄(Conventional War Crimes)', C급 전범은 c항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 위반으로 처벌된 사람들이다. 흔히 A, B, C급 전범이라고 하면 죄질의 경중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정확히는 A, B, C항 전범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실제로 모든 근대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국립묘지를 갖추고 있다. 국가가 벌인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을 추도함으로써, 앞으로의 전쟁에서도 국민들이 기꺼이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도록 고취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국립현충원도 정확히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니 "미국에는 앨링턴이 있고, 소련이나 다른 외국에도 무명전사의 무덤이 있다. 어디든 나라를 위해 쓰러진 사람에 대해 국민이 감사를 바치는 장소가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나라에 목숨을 바칠 것인가?"라는 나카소네 전 총리의 발언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이에 대해 반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A급 전범 합사 문제이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자인 그들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몸바친 사람들'로 기념하는 것은 주변국에 대한 또 한번의 침략 위협에 다름아니며, 미국이 구축한 전후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A급 전범 분사가 제기되는 것이고.

물론 지금으로서는 A급 전범 분사마저도 가능성이 별로 없어보인다. 하지만, 만일 그들의 위패만 옮겨진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한국, 중국 정부는 실제로 그런 정치적 타협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까. 도쿄대학 다카하시 테쯔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지금, 만일 A급 전범이 분사되었다고 하자.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본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한다. 한국 정부나 중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가 없다. 일본 수상은 '오늘날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이 된 영령들의 귀중한 희생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바칠 것이다.

그런 다음 A급 전범 합사가 세상에 알려진 뒤 끊어졌던 천황의 신사참배가 부활한다. 수상의 공식 참배를 원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무엇보다도 천황의 참배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원수로서 제국 육해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쇼와 천황의 책임과 천황제의 책임이 면책되었다. 또 한편에서는...침략행위에 종사했다는 점에서 가해자였던 일반 병사의 책임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고 끝나버렸다. 더욱이 천황의 권위에 따라 천황의 신사로서 병사들을 동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쟁신사' 야스쿠니 신사의 전쟁 책임도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A급 전범 분사론이 이런 희생양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노나카 히로무 관방장관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누군가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A급 전범들에게 2차대전의 책임을 지게 해 그들을 분사한다."(1999년 8월)

..너무나도 편의주의적인 책임전가이며 강요이다. 이와같이 A급 전범 분사론이 전쟁책임의 축소로 이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다카하시 테쯔야,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A급 전범 분사는 긍정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일본은 더욱 자유롭게 우경화와 '정상국가화'를 추진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다카하시 교수는 어떤 시설이냐, 거기 누가 묻혀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키나와에는 '평화의 초석'이라는 추모비가 있다. 만주사변 이후의 희생자를 국적과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의 모국어로 이름을 새겼다. 전쟁의 실태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전쟁의 허무함을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의 초석' 앞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미일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고이즈미 총리는 합장하며 참배를 했다. 정치는 어떤 시설이라도 애초 취지와 다르게 이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시설'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인 것이다.

야스쿠니의 역사관, 합사된 전범, 이런 문제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경화, 군사대국화하며 그것을 이용하려는 일본의 정치이다. 야스쿠니를 참배하느냐 마느냐, A급 전범을 분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를 만들어갈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시민들이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연대와 동시에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국가는 야스쿠니와 무엇이 다르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