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29. 21:10
(2004년 11월 28일에 썼던 글입니다.)


코트 디부아르(Cote d’Ivoire), 영어 표기는 아이보리 코스트(Ivory Coast). 그게 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수탈의 흔적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예쁜 나라 이름이라며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식민지 시절은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인구 1천 6백만의 이 나라는 지금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폭력들이,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아이보리의 기적
  
코트 디부아르는 19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갓 건설된 국가를 이끈 사람은 우푸에-브와니(Houphouet-Boigny)였다. 그는 코트 디부아르 민주당(Parti Democratique de la Cote d’Ivoire, PDCI)을 중심으로 하는 일당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코트 디부아르 경제의 핵심은 코코아와 커피 경작이었다. 우푸에는 코코아와 커피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장려했고, 외국 기업, 특히 구 식민모국 프랑스 기업이 코트 디부아르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 기업을 통해 코트 디부아르는 코코아와 커피를 유럽 시장에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고, 세계 제1의 코코아 생산국(전세계 생산량의 40%), 제3의 커피 생산국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서아프리카 경제의 견인차가 되었다. 60~70년대 코트 디부아르 경제는 고속 성장을 이룩했고, 당시 논자들은 이를 ‘아이보리의 기적(the Ivorian Miracle)’이라고 불렀다.
 

Cocoa

아이보리의 기적을 일군 코코아.
세상에는 한강의 기적만 있는 게 아니다.
(사진출처: www.afrol.com)

플랜테이션을 유지 확대하는 데에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서아프리카 인접 국가의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코트 디부아르로 몰려왔다. 특히 북쪽 국경을 접하는 부르키나 파소 국민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우푸에 정권은 이를 환영하였으며, 이들 노동자에게 토지 취득을 허용함으로써 이주를 장려했다. 이렇게 해서 코트 디부아르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5백만 명에 이르렀고, 그 절반이 부르키나 파소 인들이었다.
 
기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80년대 들어 자유화, 개방화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시장 확보가 어려워졌고, 농산물 가격은 실질가격 기준 1945년 수준으로 폭락했다. 흔들리던 경제는 결국 91년 IMF와 세계은행의 구제 금융을 받는 사태로 이어졌다. 게다가 플랜테이션은 남부와 서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고, 경제 개발로부터 소외된 북부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장기 집권에 따른 불만 세력도 형성되고 있었다. 이 모두는 우푸에 개인의 카리스마에 눌려 간신히 통제되고 있었으나, 93년 우푸에의 사망으로 갈등이 표면화된다.

 
단결을 외치며 분열을 만들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은 당시 의회 대변인 베디에(Bedie)였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다른 경쟁자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아이보리안(Ivorian, Ivoirite)’이라는 슬로건을 주창한다. 곧, ‘순수’ 아이보리안과 ‘혼혈’ 아이보리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크게 나눠도 5개 민족, 세분하면 60여개 부족으로 이뤄진 코트 디부아르 내에서 누가 ‘순수한’ 아이보리안인가를 논한다는 게 말도 안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혼혈’과 ‘외국인’들이 아이보리를 탈취하려 한다는 그의 선동은 당시 경기 침체로 불만이 팽배해있던 많은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이어진 선거법 개정을 통해 그는 ‘순수’ 아이보리안, 즉 부모가 모두 아이보리안인 사람만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를 통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사람은 어머니가 외국인이었던 공화주의 연합(Rassemblement des Republicains, RDR) 의장 와타라(Ouattara)였다. 그는 주로 북부 무슬림 인구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남부-기독교 인구와 북부-무슬림 인구간의 갈등이 첨예해졌다.
 
베디에 정권은 99년에 발생한 쿠데타로 5년만에 무너졌다. 쿠데타 세력들은 구에이(Guei)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2000년에 총선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민주당과 공화주의 연합의 투표 거부로 투표율이 37%에 불과했던 이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후보는 아이보리안 인민전선(Front Populaire Ivoirien, FPI)의 그박보(Gbagbo)였다. 그러나 개표 초반 그박보의 우세가 점쳐지자 구에이는 선관위를 해산하고 스스로 당선을 선언했다. 말도 안되는 억지에 분노한 인민전선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물론이고, 그박보 역시 불복 선언을 발표하고 지지자의 봉기를 호소했다. 결국 구에이는 베닌으로 망명했고, 그박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후보 자격을 박탈당했던 와타라의 공화주의 연합이 재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공화주의 연합 지지자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폭력사태가 계속되었고, 이들이 주로 북부 무슬림 출신이었던 관계로 갈등 양상은 민족, 종교갈등으로 변질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3일간 150명이 사망하였고,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3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박보 정권의 정책은 과거 베디에의 민주당보다 더한 극우 민족주의 정책이었다. ‘아이보리안’ 정책을 계승하면서 몇 가지 추가 조치가 단행되었다. 외국인의 토지 소유와 취업이 제한되었고, 초고액의 외국인 등록세를 매겨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떠났다. 노동력의 대거 이탈로 코코아 농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또 주민등록을 실시하면서 ‘산업화 이전’ 시기를 기준으로 본적을 적용, 북부 출신 주민들에 시민권 발급을 거부하였다. 각종 언론을 통해 혼혈인과 외국인들에 대한 비방을 쏟아내면서, 지역간, 인종간, 민족간 갈등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내전의 폭발
 
이와 함께 추진된 군부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일단의 군인들이 2002년 9월,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들은 대통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프랑스와 코트 디부아르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상황은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쿠데타 세력들은 코트 디부아르 애국운동(Mouvement Patriotique de Cote d’Ivoire, MPCI)을 결성하고, 신속하게 병력을 전개하여 국토의 북쪽 절반을 장악했다.
쿠데타 발생 즉시 집권 인민전선은 이를 ‘외국인의 음모’라 규정하고 공화주의 연합과 부르키나 파소를 배후로 지목했다. 흥분한 인민전선 지지자들은 거리를 누비며 ‘반란의 배후세력’들을 폭행하고, 약탈, 방화를 저질렀다. 그박보는 이참에 아예 반대 세력들을 깨끗이 제거할 생각이었다. 모든 비판자는 ‘반군의 동조세력’으로 규정되어 체포되었다. 특히 빈민들이 추방되고 이슬람 사원을 파괴했으며 이슬람 성직자들을 체포, 살해했다. 이에 앞장선 것은 ‘애국 청년’을 자칭하는 사설 조직들이었다.
 
애국운동이 부르키나 파소 내에서 반란을 모의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무기와 자금 조달에 부르키나 파소가 개입한 흔적도 발견된다. 코트 디부아르 내에서 박해받는 수백만의 자국민을 감안할 때 부르키나 파소로서는 반란에 개입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현지 외교관들은 반란의 국내적 원인을 더 강조한다. 부르키나 파소 정부는 한때 자국 내에 망명중인 코트 디부아르 군인들을 사면을 전제로 송환할 것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 이 제안을 거부하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경고했으나 코트 디부아르는 이를 무시했다.
 
한편 정부군의 반격은 지지부진했다. 군기도 무장도 지휘체계도 형편없던 이들은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탈환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프랑스로부터 쿠데타 발생을 통보받고도 몇 시간이나 미적대고 있는 통에, 대통령이 이들의 충성심을 의심할 정도였다. 반군의 남하를 막아준 것은 프랑스 군이었다. 아울러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도 개입, 세네갈의 중재로 02년 10월에 휴전에 합의하면서 국토를 남북으로 절반씩 가르는 휴전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한 달 후, 서부 지역에서 새로운 반군 집단이 출현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운동(Mouvement pour la Justice et la Paix, MJP)과 위대한 서부 아이보리안 인민운동(Mouvement Populaire Ivoirien du Grand Ouest, MPIGO)이라 이름한 두 단체는 각기 2년 전에 자행된 정부군의 학살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이들의 남하 역시 프랑스 군이 개입하여 차단하였다.
 
정의와 평화를 위한 운동은 애국운동의 서부 지부라고 일컬어진다. 장비와 물자를 공유하고 지휘체계도 중첩되는 등 두 단체 사이의 연관이 발견된다. 애국운동은 휴전 이후 대치 상황이 장기화 될 것이라 예상하고, 정부군 무장에 쓰일 자금의 유입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서쪽에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휴전 협정을 직접 깨뜨리지 않으면서 서부의 코코아 농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반면 위대한 서부 운동은 라이베리아의 테일러가 조직한 반군이다. 그박보는 라이베리아  반군 MODEL(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그래도 양국 관계가 좋지 않은 판에, 코트 디부아르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테일러 역시 이에 개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운동은 테일러의 정적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른 반군을 조직한 것이다. 위대한 서부 운동 구성원은 아이보리안은 거의 없고 실상은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출신 용병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10월 휴전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적용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반군을 포괄하는 새로운 휴전 협정이 03년 1월에 체결되었다. 아울러 프랑스와 ECOWAS의 중재로 모든 분쟁 당사자가 참여하여 리나-마르쿠시 평화 협정이 같은 달 체결되었다.
 
각 정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과도 정부를 구성하여 선거법, 국적법, 토지법 등 주요 이슈를 해결하고 05년에 총선을 실시한다는 협정 내용에 합의한 회담장은 자못 감격의 도가니였다. 모든 참가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코트 디부아르 국가를 합창했고, ‘새로운 평화를 위해’ 잔을 들었다. 그러나 협정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인민전선 지지자들이 ‘혼혈과 외국인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협정이다’라고 강력히 반발하며 봉기했고, ‘형제들과 합의에 도달해 기쁘다’던 그박보 대통령은 협정이 아니라 제안일 뿐이었다며 발을 뺐다. 정부측의 배신에 분노한 반군은 9월에 협정 탈퇴를 선언했고, 3개월만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불신의 벽은 여전히 높다.
 
현재 휴전선을 중심으로 40~60km 폭의 비무장지대(신뢰 지대, Zone de Confiance)가 설정되어 4천명 규모의 프랑스 군과 6천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정전 감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겨우 양측의 충돌만을 막고 있을 뿐 전국적인 치안 확보는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고, 남부 정부측 지역과 서부 반군 지역에서는 부족간, 인종간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유엔군 스스로가 인민전선 지지자들의 공격 대상이 될 지경이다.
 
지구상 두 번째 분단국가?
 
애국운동 점령하에 있는 북부 지역은 비교적 치안상황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군 지도부는 주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 행사나 약탈 등을 엄금했고, 위반자가 있을 경우 즉결 처형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보급품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반군의 모습에 주민들이 호감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반군의 재정이 점차 고갈되면서 ‘세금’의 징수와 농작물 저가 수매가 실시되고 있다고도 한다.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도 난점이다.
 
대치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반군은 점령지역에 나름의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군 체계도 정비하고, 독자적인 행정부, 언론, 경제 체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하면서 현재의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현재로서는 평화협정도 사문화 되다시피 해서 내년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평화 회복을 위한 유일한 합의인 리나-마르쿠시 협정이 폐기되면 코트 디부아르는 한반도에 이어 지구상 두 번째의 분단국가가 될지도 모른다.
 
서부 지역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외국 용병들이 활개치는 서부 지역은 주민들에 대한 약탈, 강간, 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다. 특히 라이베리아 출신 용병들은 그 잔혹성으로 악명이 높다. 때로는 라이베리아 인끼리, 즉 테일러 계 MPIGO와 그박보 계 MODEL이 서로 전투를 벌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들 용병들은 아이보리안의 통제에서도 벗어난 상태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코트 디부아르 내의 애꿎은 라이베리아 난민에게 보복을 가한다. 테일러가 라이베리아에서 추방된 후, 반군들의 합동 작전으로 라이베리아 계 용병들은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이지만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있다.
 
아이보리를 아이보리안에게!
 
어느덧 10여년째 계속된 ‘아이보리안’이라는 수사는 이제 강력한 정치적 구호가 되었다. 특히 취업난으로 고생하는 젊은층에게 이 구호는 매력적이다. ‘애국 청년단’을 조직한 인민전선 지지 청년들은 국부를 유출해가는 외국인을 추방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며 주요 사태 발생시마다 외국인에 대한 폭력 테러를 자행하였고, 내전 초기부터 자행된 테러로 25만명의 부르키나 파소 출신자들이 출국하였다. 이들은 대통령실의 직간접 지원을 받으며 경찰과 정규군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집단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들의 표적이 되는 것은 부르키나 파소 출신뿐이 아니다. 구 식민지배자 프랑스도 강력한 비난을 받고 있다. 처음 내전 발생시 반군의 남하를 막아준 것이 프랑스 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프랑스가 반군과 연계해 정부를 장악하고 국부를 착취하는 신 제국주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한다. 현재 확보한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반군을 육성, 지원했다는 얘기다.
 
최근 프랑스 군 기지를 폭격하던 정부군 전투기가 프랑스 군에 의해 격추되면서 반 프랑스 감정은 극에 달했다. 프랑스 관련 시설이 공격받고, 프랑스 인에 대한 증오는 백인 전체에 대한 증오로 확대되어 수십 명의 백인 여성들이 집단 강간당하고, 수백 명이 유엔 건물로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프랑스 초중고생도 공격 대상이 되고 있으며, 강력한 반 프랑스 감정 때문에 프랑스는 군인을 4천명이나 파견하고도 전면에 나서서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반군들은 반대로 프랑스가 정부의 휴전협정 위반 행위를 방치한다고 비난한다).
 
코트 디부아르 내에서 프랑스가 확보한 이권은 얼마나 될까? 유무선 통신, 철도, 전기, 수도 분야 주요 기업의 대주주가 프랑스 계 기업이며, 자동차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코트 디부아르 내 코코아 수출회사 중 프랑스 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15%로 3위이다(1위 ? 미국 25%, 2위 ? 코트 디부아르 20%). 이로 볼 때 프랑스가 긴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반군과 정치적 연계를 맺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권 보호 차원이라면 오히려 정치적 안정이 더 중요할 터이다. 또한 내전 이후 각국의 원조가 거의 중단된 가운데서도 프랑스는 원조를 계속 제공하고 있다.
 
 
언론 매체의 선동은 광적인 민족주의를 더욱 부채질한다. 관영 매체 및 친 인민전선 언론들은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이민자의 자식들과 프랑스 신식민주의로부터 코트 디부아르를 정화하고 해방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공공연히 선언한다. 직접 이런 주장을 했다가는 맹렬한 정치적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있는 그박보 대통령은 겉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는 척 하면서 측근을 통해 이들 언론을 부추기고 극우 청년단체를 조종하고 있다. 어느 틈에 ‘반군=북부인=무슬림=외국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북부 출신자나 공화주의 연합 지지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와 폭력도 끊이지 않는다. 수도 아비장에는 수십 만 명의 북부 출신 청년들이 거주하는데, 대규모 폭력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얼마나 막대한 희생이 초래될지 예상조차 하기 힘들다.
 
민족주의는 재앙이다
 
현재로서는 이들이 과연 한 나라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런 현상은 결코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이 아니다. 길게 잡아도 정적을 몰아내기 위한 베디에의 정략으로서 간신히 10년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 이전 30년이라는 기간동안 코트 디부아르 국민들은 큰 충돌 없이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이들의 민족주의가 역사적 연원이 없다는 것은 인민전선 지지자들간에 혈연적, 문화적, 종교적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플랜테이션 지대에 살면서도 외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점 정도. 경제적 문제가 민족적 문제로 변질되면서 잔인한 폭력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해결의 전망도 요원하게 되었다.
 
내전을 겪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를 박해하고 증오하는 현재의 모습을 볼 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분리 독립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두고 외국인이 똑 같은 말을 할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올바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이보리안들이 할 일이지만, 이웃이요 친구이던 이들끼리 이다지도 미워하며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오늘의 현실은 누구를 탓할 것인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동적 성명으로, 언론의 흑색 선전으로 얄팍한 민족감정을 선동하는 정치인들, 어디 코트 디부아르 뿐이겠는가. 민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그래서, 민족주의는, 재앙이다.
 
※ 참고문헌
 
Foreign Policy In Focus(http://www.fpif.org), Cote d’Ivoire, 2002. 4.
International Crisis Group(http://www.icg.org), Cote d’Ivoire: The War is Not Yet Over(2003.11), Cote d’Ivoire: No Peace in Sight(2004. 7)
Human Rights Watch(http://www.hrw.org), Cote d’Ivoire: Accountability for Serious Human Rights Crimes, Key to Resolving Crisis(2004.10)
World Press Review(http://www.worldpress.org), Another Chance for Peace in Cote d’Ivoire(2003.3), Cote d’Ivoire: Death of a Journalist(2004.1)
United Nations Mission in Cote d’Ivoire 홈페이지(http://www.un.org/Depts/dpko/missions/minuci/index.html)
United Nations Operation in Cote d’Ivoire 홈페이지(http://www.un.org/Depts/dpko/missions/unoci/)
UN 보도자료
UN News(http://www.un.org/news)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