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29. 21:13
(2005년 1월 2일에 썼던 글입니다.)


‘카리브 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막연히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뜨거운 태양, 맑고 푸른 바다, 해변의 새하얀 모래, 낭만의 섬들. 그래서 아이티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휴양지로 유명하겠거니, 관광 산업이 발달했겠거니 하고 멋대로 상상해왔었다.
 
그러나 아이티는 결코 그런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인구 800만의 이 나라에서 약 380만 명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3백 달러에 불과하고,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80%나 된다. 반면에 상위 5%의 부유층이 국부의 70%를 차지하는,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국가이다. 실업률도 50%에 이르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인간개발지수 순위는 173개국 중 150위를 기록했고, 어린이 10명 중 1명이 5세 이전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게다가 작년에는 두 차례나 덮쳐온 허리케인에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참담한 사회가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데타와 독재, 내란과 외세의 개입으로 얼룩진 아이티의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흑인 최초의 독립 공화국
 



아이티. 쿠바 남동쪽에 위치해있다.
남태평양에 있는 타히티랑 헷갈리면 안된다.
(사진 출처 : 유니세프www.unicef.org)

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뇰라 섬에 도착했을 당시, 섬에는 약 3~4백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한다.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을 거치며 이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학살당하고, 질병에 감염되어 쓰러져갔다. 1625년에는 프랑스 군이 상륙해와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72년이나 지난 1697년에 조약을 통해 섬 서부를 할양받아, 이 지역이 현재의 아이티를 이루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 혁명은 아이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노예 해방과 평등 대우를 요구하며 운동을 벌이던 아이티의 혼혈인과 흑인들은 1791년에 이르러 독립 전쟁을 선포했다. 이들은 백인들 내부의 분열을 이용해 전국을 장악했으나, 나폴레옹은 8만 2천명이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휴전 협상을 제안해놓고는 협상장에서 독립군 지도자를 체포하는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머나먼 섬나라에서 격렬한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1804년 1월 1일, 이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 이름을 아이티로 정했다(아이티는 원주민 타이노 어로 ‘높은 땅’이라는 뜻이다). 아이티는 흑인들이 건국한 최초의 독립 공화국이라는 영예도 아울러 얻게 되었다.

독립은 했지만 아이티의 앞날은 험난했다. 독립전쟁 중에 최소 6천 명 이상의 수많은 백인들이 학살당했고, 독립 이후에도 과거의 억압과 착취의 보복으로 섬에 남아있던 백인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이어져 아이티는 야만국, 반문명국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 내 다른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여, 서구 열강들로부터 ‘불량국가’ 취급을 받으며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독립을 승인한 데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며 1억 5천만 프랑을 지불할 것을 청구했다.
 
국제적 분위기가 이렇게 적대적이었던 데다가, 국내 사정도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함께 싸웠던 이들은 혼혈인과 흑인으로 분열되어, 혼혈인들은 플랜테이션 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흑인들을 탄압했다. 그 강압통치는 과거 백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백인들이 쫓겨났을 뿐, 식민 지배구조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집권층들은 권력투쟁에 몰두, 한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기도 했었다. 그 후로도 정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어서, 암살과 반란, 쿠데타로 72년간 정권이 22번 교체되었다. 3년 반 만에 한 번씩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 또한 1825년에 아이티가 결국 프랑스에 ‘손해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국고를 탕진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로도 프랑스에 정치·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되었다.
 
1915년, 미국 해병대가 전격적으로 아이티에 상륙했다. 명분은 아이티가 당시 정치범 167명을 처형한 것에 대한 항의라고 하나, 실제로는 1차대전 전후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증가하던 독일의 경제·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점령만 한 것이 아니라 아이티 국고에서 50만 달러를 강탈해갔으며,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무려 2천 명을 사살하였다. 이러한 침략을 자행한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윌슨 대통령이었다. 미국은 1934년까지 주둔하며 아이티 정부를 감독하고 군대를 창설하였으며, 이로 인해 철수 후에도 아이티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미국 철수 후에도 한동안 군사정권이 계속하여 들어섰으며 정치 불안은 여전했다. 그리고 1957년, 뒤발리에 정권이 시작되었다.

 
정치적 안정? 부자 세습 독재정권!
 
뒤발리에의 집권 이후 정치상황은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 종신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4년간 집권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정권이 바뀌던 아이티에서 이런 장기집권이 가능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의 통치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철저한 통제에 기반했는가를 나타내준다. 그는 친위대를 조직하여 자신의 정적이나 비판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그의 집권 기간동안 살해당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 더구나 원조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1962년부터는 미국의 원조마저 끊기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쿠바나 미국으로 탈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뒤발리에가 197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였다. 당시 그는 정치 경험도 없던 19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부자 세습 정권이라니, 공화국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어린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고, 인도적 차원에서도 아이티의 상황을 두고볼 수는 없던 터라 곧 국제사회의 원조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역시 아버지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이티 내에서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하고, 마침 미국도 뒤발리에에게 퇴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1986년에 뒤발리에는 사임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독재의 종말을 국민들은 기뻐하며 환영했으나, 곧 또다시 혼란이 찾아들었다. 박해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주로 친위대 하위계급 대원들을 대상으로 보복 폭력과 살해가 만연하였다. 게다가 권력 공백 상태를 이용해 4년간 네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아리스티드, 민중의 승리?
 
그 와중에서도 성과가 있었다면, 대통령 선거를 위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 뒤발리에 정권에 참여했던 사람은 10년간 공직 취임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있었다. 과거 청산과 민주화를 위한 아이티 국민들의 바램이 표현된 것이다.
 
이어서 1990년, 대망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여기서 스타로 떠오른 사람이 아리스티드였다. 해방신학을 주창하는 신부 출신이었던 아리스티드는 구 군부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제까지 정치권으로부터 외면받아오던 빈민, 노동자, 소외계층을 위해 발언하며 사회 경제적 차별 철폐를 주장하여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당시 아이티 정치권의 좌파-중도좌파 연합은 군부측 후보의 낙선을 위해 출마를 포기하고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고, 선거 결과 아리스티드는 70%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이티 역사상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된 그는 민주화와 사회 발전을 위한 아이티 국민들의 열망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91년 1월에 취임한 아리스티드는 곧 개혁 정책들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부패를 방지하고 세입을 늘리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시행되었고, 이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호의도 얻었다. 그렇게 해서 90년대는 감동적인 ‘민중의 승리’로 기록되는 듯 했다.

 
그들의 역습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닌 기득권층은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취임 9개월만에 쿠데타가 일어나 아리스티드는 미국으로 망명하고, 군부독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쿠데타 배후에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일단 군부를 비난하며 아이티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미국도 속사정이 상당히 복잡하다. 뒤에서 검토하겠다). 미주기구(OAS) 등도 헌정 중단을 비난하며 경제 제제를 결의했다.
 
군부 정권은 그야말로 뒤발리에 정권의 재림이었다. 친위대와 비밀경찰, 정보기관이 아리스티드 지지자와 노조 활동가 등을 색출하며 처형했고, 이로 인해 3천~5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탄압을 피해 사람들이 탈출하면서 난민이 대거 발생하여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미주기구와 유엔이 중심이 되어 무기·석유 금수조치까지 발동하며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였으나, 군부 정권과 헌정 회복을 합의하기까지 2년이나 걸렸고 그나마 지켜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미국 해병대가 아이티에 상륙하였다. 아이티의 저항은 없었고,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군 지도자와 11시간이나 협상을 한 끝에, 결국 아이티 군부는 사퇴하고 아리스티드에게 정권을 되돌려주는 데 동의하였다. 아리스티드는 94년 10월에 미군의 블랙호크 헬기를 타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싸우면서 닮는다
 
아리스티드가 망명해 있는 동안, 독재 정권을 견디면서 아이티 민중들 사이에서 아리스티드의 인기는 오히려 더욱 높아졌다. 아리스티드에게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중의 지도자, 반동적 쿠데타로 쫓겨난 비극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가 새겨졌고, 사람들은 그를 아이티를 재건할 ‘메시아’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온 그에 대한 높은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아리스티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우선 그는 복귀에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티 헌법은 대통령직 연임을 허용하지 않는데, 망명기간 3년은 임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년 남짓한 임기만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95년 말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였으나, 그냥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꼭두각시 후보를 자기 후계자로 내세웠고, 총선과 대선은 부정으로 얼룩졌다. 아리스티드는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하였고, 신임 대통령은 실권을 갖지 못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해방신학자라는, 민중의 대변자라는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깨졌다. 그는 단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꾼일 뿐이었다. 이후 상황은 과거 군부 정권 시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실시되는 선거는 모두 부정으로 얼룩졌고, 국제 원조는 중단되었으며, 구 기득권층은 계속해서 저항하고, 아리스티드는 정치깡패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아리스티드에 대한 기대는 환멸로 변하였다.

 
미국이 진짜로 원하는 것
 
여기서 미국의 아이티 정책을 잠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미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아이티에 대한 주요 원조 공여국이지만, 모든 국제관계가 그렇듯 공짜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티 정책은 단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모순적이고 분열되어있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미국 투자가들과 다국적 기업, 수출업체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아이티의 민주화를 지원하며 경제 성장을 위한 조건을 조성하려는 입장(물론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과 아이티 군부 및 기득권층과 결탁하는 입장이 공존하였다. 아이티 민중들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은 원조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티에 개입하였다. 원조에는 대개 최저임금의 인하·억제, 노조 통제, 투자 이익의 국외 반출 허용 등과 같은 조건이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서는 IMF와 세계은행이 다시 한 번 구조조정을 강제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안 그래도 낮았던 관세의 철폐(이로 인해 관세가 0~3% 수준까지 떨어졌다), 수입규제 철폐, 특히 보건과 교육 분야에 대한 정부 지출 삭감, 임금 통제 등이었다. 이에 더하여 주요 수출품이던 농산물의 시세도 떨어져, 아이티 국민들의 실질임금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수많은 빈곤층이 양산되었다.
 
아리스티드 집권 이후 미국 정책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비교적 온건파라 할 수 있는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측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아리스티드를 지지했다. 그러나 국방부와 CIA는 좌파적 수사를 구사하는 아리스티드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구 군부를 지지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민주적 개입liberal interventio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아리스티드의 복귀를 도왔지만, 그 순간에도 공화당 및 정보기관은 아이티 군부를 지원하고 있었고, 후에 이 사실이 폭로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일설에는 미국이 아이티에 대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부를 지원했다는 의혹도 있다. 군부가 강력하면 할수록, 그 저항을 누르고 아리스티드를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미국의 역할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꼭 그런 음모론적인 해석이 아니라도, 선과 악, 미국과 비-미국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진 공화당이나 군부, 정보기관들의 눈에 아리스티드는 ‘위험한 인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 자본의 이익 보호라는 목표는 공통된 것이었다. 90년대 이후로도 서방 국가와 국제금융기구의 원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붙었고, 세금 인상, 민영화, 수출 보조금 철폐 등의 조치로 민중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만 간 것이다.
 

그 놈이 그 놈, 그 나물에 그 밥?
 
2000년대 들어 반 아리스티드 운동이 점차 격화되었다. 선봉에 선 것은 역시 구 군부와 기득권층이었다. 이들은 ‘민주 연대Convergence Democratique’를 결성하고 01년 7월부터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또다른 쿠데타를 우려하여 95년에 아예 군대를 해산시켜버렸지만, 군인들의 무장 해제에는 실패했던 아리스티드는 경찰력 이외에는 반군을 진압할 수단이 없었다. 결국 군인들은 무기를 고스란히 확보하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효과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고, 애매한 민간인들에게 보복을 해댄 통에 반정부 감정만 높아졌다.
 
또한 친정부 활동을 벌이던 한 무장단체도 지도자가 처형되자 책임을 아리스티드에게 돌리며 반란을 시작했다. 이들은 식인종 군대(Cannibal Army)라고 이름짓고 각 지역을 점령해나갔다. 이들 외에도 구 친위대 출신들로 구성된 아이티 진보 혁명군(Forces Revolutionaire Arme pour le Progres d'Haiti, FRAPH), 기타 군소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어 반정부 반란을 벌였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이티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이 이만큼 잘 들어맞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훈련도 장비도 열악했던 5천명 규모의 경찰은 반군과 전투는커녕 도망치기에 바빴다. 반군은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였으며, 아리스티드의 퇴진을 촉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수도로 진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군이 수도에 진입하면 아리스티드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유혈 충돌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아리스티드는 2004년 2월 29일에 사임하고 미국이 제공한 항공기 편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망명했다.
 
망명지에 도착한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자의로 사임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자신을 포함한 수천 명이 희생될 것”이라며 ‘협박’했다는 것이다(이 말은 굳이 협박이라기보다는 사실판단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같은 발표에 카리브 해 경제공동체(CARICOM)는 진상 규명과 유엔 차원의 조사를 주장했으나 미국과 프랑스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거부했다.
 
 
아리스티드 이후의 아이티
 
아리스티드의 퇴진 이후, 유엔의 중재로 과도정부가 구성되고 2005년 11월에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는 과도정부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재건은 고사하고, 치안상황은 오히려 날로 악화되는 형편이다. 특히 과거 아리스티드 지지층에 대한 폭력과 테러가 극심하다. 정부도 이들의 보호에 미온적이어서, 이들은 과도정부가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탄압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Top US general Richard Myers has warned it will take time to restore stability in Haiti after the departure of President Jean-Bertrand Aristide.Speaking during a brief visit, General Myers said violence would not be tolerated and would be "dealt with"(US DoD) (Photo: US DoD)

아이티 시내를 순찰하는 미군.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기 전까지 아이티 치안을 담당했다.
(사진출처: as.wn.com, 미 국방부 제공)

 
아이티의 치안 확보를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치안상황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반군과 사병조직의 활동으로 학교 수업이나 기업활동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평화유지군 측은 설립 결의안에 “과도정부의 치안 확보 노력을 ‘지원한다’”라고 규정된 것을 이유로 정부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 이상 유엔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가 최근에야 정부와 함께 소규모 무장해제 작업을 시작했다. 평화유지군은 최근에서야 목표 병력인 군 6700명, 경찰 1600명의 80% 정도를 확보해 비로소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주요 파병국이다. 경찰력은 요르단, 중국, 카메룬 등이 파견하고 있다).
 
현재 아이티 재건을 위한 국제 원조는 충분히 약속되어있다. 그러나 다양한 원조 제공국이 각자의 개혁 프로그램을 제안하여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던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원조 공여자간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다행히 04년 7월에 워싱턴에서 각 공여국이 모여 합동으로 필요한 원조 예산을 심의·승인하였다. 이 개혁 프로그램이 과거와 같이 기득권층과 국제 자본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티 국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부 학자들은 아이티는 ‘실패한 국가’의 전형이라며 고개를 내젓기도 한다. 아이티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반식민지 투쟁에 ‘최초’로 성공한 대가를 값비싸게 치른 나라로, 제국주의와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권력 투쟁에만 몰두해왔고, 하고 있는 아이티 지도층들의 책임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독립에 앞서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없이, 백인 지배자의 축출에만 집중했던 것이 큰 실책이 아니었을지. 그렇다면 아이티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유엔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상황은 현재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제는 전통이 되어버리다시피한 각 세력들간의 오랜 적대와 반목을 거둬내고 과연 화해와 국가 재건이 가능할지, 이를 위해 2005년은 아이티에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다.
 
 
※ 참고문헌
 

『한겨레 21』
http://www.discoverhaiti.com
United Nations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MINUSTAH) Homepage(http://www.un.org/depts/dpko/missions/minustah)
Amnesty International(http://www.amnesty.org), Breaking the Cycle of Violence: A Last Chance for Haiti?(2004.6)
Foreign Policy in Focus(http://www.fpif.org), U.S. Policy in Haiti(1997.1), Haiti: Dangerous Muddle(2004.3)
Human Rights Watch(http://www.hrw.org), Haiti: Human Rights Conditions prior to the June 1995 Elections(1995.6), Aristide's Return to Power in Haiti(2001.2), Haiti: Recycled Soldiers and Paramilitaries on the March(2004.2), Haiti: Violent Reprisals Feared(2004.2)
International Crisis Group(http://www.icg.org), A New Chance for Haiti?(2004.11)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port of the Secretary-General on the United Nations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Document No. S/2004/908, 2004.11)
기타 외신 종합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