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5. 7. 17. 02:00

국가정보원 직원이, 국가정보원 사무실에서, 국가정보원 IP로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직원은 자기 이메일 아이디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거나 빌려준 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 이메일을 자신이 작성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이 메일은 누가 쓴 걸까요?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선 개입 의혹 재판 이야기입니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저 파일을 국정원 직원이 작성했다고 봤습니다. 법정에서는 부인했지만 검찰 조사에서는 자기가 인터넷에서 모아서 만든 파일이라고 인정했거든요. 재판 때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도 '내 이메일함에 있다면 내 메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죠. 결국 재판부는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형사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있는 문서는 엄격히 제한돼있습니다.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조차도 피고가 법정에서 부인하면 휴지조각이 됩니다. 문서가 형사 재판에서 증거가 되려면 작성자가 본인이 작성했다고 인정하거나, 공공기관이 발행하는 공식 증명서, 혹은 업무상 통상적으로 작성되는 문서인 경우 정도입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놓은 이유는 강력한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힘 없는 개인인 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서류를 모두 증거로 인정한다면, 피고에게 불리하게 조작된 서류 때문에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는 사람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범죄자 열 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어선 안 된다.' 모두가 잘 아는 근대 형사법의 대원칙입니다. 그래서 유죄를 선고하려면 '무죄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없어질 정도의 증거'가 필요하고, 그 증거는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수집돼야 하고, 법으로 인정되는 증거만 활용해야 하며, '의심스러울 때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즉 무죄로 판결하는 게 원칙입니다.

 

널리 보도된 대로, 대법원은 문제의 이메일을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어찌 됐건 국정원 직원은 해당 파일을 작성했다는 진술을 번복했고, 트위터 계정 목록을 담은 정도인 파일을 국정원의 '업무상 통상 문서'라고 보기는 어려운 데다, (형사소송법에서 예로 든 '업무상 통상 문서'는 상업장부와 항해일지인데, 얼른 보기에도 국정원 직원의 이메일과는 좀 느낌이 다르죠?) 작성한 경위나 정황도 분명하지 않아서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법적으로 보면 대법원은 형사소송법의 원칙을 충실히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피고인 원세훈은 자연인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저지른 범죄 혐의의 총책임자로 법정에 섰습니다. 그것도 그냥 국가기관이 아니라 4대 권력기관으로 일컬어지는 국가정보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권력의 횡포에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칙을, 공권력의 횡포를 다루는 재판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올바른 일일까요? 원세훈 전 원장의 자유권을 보장하느라, 국민의 주권과 참정권 훼손을 용인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저는 법학을 잘 모릅니다. 이런 제 의문이 합리적인지, 아니면 '인권의 보편성'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인지도 자신이 없습니다. 채택 여부에 따라 '대선 개입' 유무죄가 갈리게 되는 결정적 증거, 그런 증거일수록 더더욱 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엄격하게 평가돼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내려지는 결론이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다'처럼 당혹스러운 것이라면, 법과 법원에 대한 시민들의 냉소는 더욱 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