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이야기2011. 8. 29. 21:14
(2005년 1월 24일에 썼던 글입니다.)


평온한 날 없던 2004년을 마지막으로 강타한 것은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었다.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 수는 무려 22만 여명. 이것으로도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인데, 아직도 집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 하니 뉴스를 보기 두려울 뿐이다.
 
스리랑카에서도 이번 해일로 약 3만 여명이 희생되었다. 2천 년 역사동안 해일 같은 건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던 터라 그 피해는 더욱 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북동부 지역은 20여년에 걸친 내전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있던 지역이었다.
 
하나의 섬, 두개의 민족
 

스리랑카. 동양의 진주, 인도의 눈물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블랑카의 고향으로 더 친숙하지 않을지.--;
(지도 출처 : CNN 홈페이지)
 
인구 약 1900만 명의 스리랑카. 이중 74%(1200만)를 차지하는 신할리 족과 18%(300만)를 차지하는 타밀 족이 오랜 기간 내전을 치러왔던 두 개의 주요 민족이다.
 
두 민족 모두 오랜 기간 스리랑카에 정착해왔다. 신할리 족의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에 비자야 왕자가 불법을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인도에서 건너왔으며, 신할리 족은 이들의 후손이라 한다. 물론 이건 전설일 뿐이고 역사적•고고학적 증명은 곤란하지만 이들이 먼 옛날에 인도에서 건너온 것은 분명하다. 타밀 족 역시 비슷한 정도로 먼 옛날에 인도에서 건너왔다. 인도의 타밀 나두 주에도 타밀 족이 거주하고 있다.
 
긴 역사동안 두 민족은 각기 나라를 건설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싸우며 살아왔지만, 오늘날 내전의 뿌리를 고대의 갈등에서 찾는 것은 무리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지역감정을 백제와 신라의 경쟁으로부터, 남북 분단을 신라와 발해의 투쟁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두 민족의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서로에 대한 적대의식은 발견되지 않으며, 둘은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때때로 전쟁이 있더라도 그것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과 같은 지역적 패권 경쟁일 뿐이었다.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를 거쳐 1815년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기에도 두 민족간의 불화는 없었으며 영국도 분할 통치를 시도하지 않았다. 스리랑카는 원활하게 통치되어, 영국 식민지의 모범으로까지 꼽히기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제국의 은혜’를 받았다거나 선정을 베풀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다른 식민지와 같은 격렬한 민족해방운동이 없었고, 영국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민족해방운동의 부재’때문에 신할리 족, 타밀 족을 넘어서는 ‘스리랑카 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했고, 이것이 독립 후 내전의 불씨가 되었다는 역설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어쨌든 2차 대전 중 영국은 스리랑카(당시 이름으로 영국령 실론 섬)의 독립을 약속했고, 전문가를 파견하여 헌법 기초와 기타 정부 구성의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1948년, 약속대로 스리랑카는 독립을 얻었다.
 
신할리 족 : 다수의 횡포
 
신생 정부의 정권을 잡은 것은 신할리 족이었다. 인구 수도 신할리 족이 월등히 많았던 만큼, ‘민주적’ 투표로는 타밀 족은 신할리 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타밀 족에 대한 차별 정책이 하나 하나 시행되어 간다.
 
타밀 인들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하고, 사민정책을 펴서 타밀 족 주요 거주 지역에 신할리 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타밀 인들은 식민화 정책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언어도 신할리 어가 유일한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인구의 90% 이상이 타밀 족인 지역에서도 신할리 어 사용을 강제하는 바람에, 듣지도 배우지도 못한, 타밀 어와는 완전히 다른 신할리 어를 사용해야 하는 타밀 인들의 고통은 일본어 공용을 강제당한 한국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72년에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나라 이름마저 신할리 어인 스리랑카(Sri Lanka : 위대한 성취, 혹은 빛의 나라라는 뜻)로 바꿔버리고, 국기에도 신할리 족의 상징인 사자를 그려넣음으로써 타밀 족을 완전히 없는 민족 취급해버렸다.
 
타밀 어로 출판되는 책이나 신문, 영화의 제작과 배포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 정원이나 공무원 임용에 있어서도 타밀 인의 비율을 15% 이내로 제한했다. 타밀 족이 기득권 소수집단이라면 진보적인 조치이겠지만, 다수 신할리 족으로부터 억압받는 처지에 이 같은 조치는 또 하나의 중대한 차별이었다.
 
이러한 억압에 대항하여 일찍부터 타밀 인들의 저항 운동이 있어왔다. 독립 직후 1949년부터 타밀연방당을 창설하여 연방제 실시, 타밀어의 제2 공용어화,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인구 수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의회 내에서의 투쟁은 한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할리 족 내 극단파들의 주장은 날로 강경해져서, 북동부 타밀 지역에서 타밀어를 병용하자는 법안이 제출되자 국회의장이 피살당할 정도였다.
 
억압과 차별에 항의하는 타밀 인들의 평화 시위가 있었으나 신할리 극우파들의 공격을 받아 무려 150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자잘한’ 충돌은 제외하고 대형 유혈사태만 1983년까지 7차례 발생했다. 1983년은 그 정점이었다. 수도 콜롬보 뿐 아니라 스리랑카 전역에서 전국적인 반 타밀 폭동이 일어났다. 정부가 집계한 ‘공식’ 사망자는 400명이지만, 타밀 측 주장으로는 3천여 명에 달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타밀 거주 지구로 모여들었고 이렇게 발생한 난민이 10만명, 호주나 캐나다 등 외국으로 피신한 난민이 17만 5천 명에 이른다. 그 전부터 의회 중심, 비폭력 투쟁의 한계를 절감하던 타밀 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장 투쟁에 돌입한다. 36개에 달하던 무장운동단체는, 곧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 연대(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 이하 ‘타밀 호랑이’)로 수렴된다.
 
분노의 폭발, 20년 전쟁
 

타밀 지역 지도. 짙은 색 부분이 타밀측 지역.
(지도 출처 : www.fas.org)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이다.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해도, 싸우려는 의지가 없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반면 조악한 무장이라도 싸움을 위한 의지에 불타고 있다면 결국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랜 시간 차별과 억압에 희생되어온 집단적 기억, 그리고 신할리 인들의 폭력에 어머니가, 형제가 쓰러져간 개인적 기억을 안고, 복수를 위해 총을 든 타밀 호랑이 전사들을 정부군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열악한 장비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격렬하게 싸웠다.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고 죽을지언정 포로는 되지 않는 그들의 ‘독한’ 모습에 세계가 경악했다. 정규전 외에도 정부 요인에 대한 암살이나 주요 공공기관에 대한 폭탄 공격으로 그들은 ‘테러리스트’라는 딱지 또한 얻게 되었다.
 
타밀 호랑이의 요구사항은 분리 독립이었다. 그들은 민족 자결권을 주장하며 신할리 정부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자치를 요구했다. 정부는 ‘평화의 전쟁’을 말하며 타협 없이 강경 진압으로 맞섰다. 87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정부측 요청으로 인도군 7만 명이 평화유지군으로 스리랑카에 상륙하여 치안 상황을 감시하기로 했지만, 독립 타밀 국가가 세워질 경우 인도 내 타밀 족들이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하는 인도가 공정한 중재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인도는 타밀 반군들을 괴멸하려 했고, 타밀 인들은 인도의 평화유지활동(Peace Keeping Operation)은 평화살해활동(Peace Killing Operation)이라며 빈정댔다. 결국 인도군은 2500명의 사망자를 낸 채 89년에 철수했다.
 
그 후 전투와 휴전 협상이 번갈아가며 계속되었다. 91년에 재개된 내전은 93년 스리랑카 프레마사다 대통령 암살로 절정에 달했다가, 94년 8월부터 협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98년에 정부가 타밀 호랑이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면서 협상은 다시 결렬. 그 동안 정부군은 내전 개시 후 타밀 호랑이가 장악해왔던 북부 지역 자프나 반도를 탈환(95년)했다가 타밀 호랑이에 다시 내주었다(00년). 그러는 동안 약 6만 5천명이 희생되었으며, 전투가 아닌 기아와 빈곤으로 인한 사망자도 수천 명에 이른다.
 
오래된 내전, 복잡한 속사정
 
오랜 전쟁으로 양측 모두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휴전과 평화를 추진하고자 해도 이제까지 누적된 상호간의 불신, 그리고 각자의 내부 사정 때문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측은 휴전과 평화 회담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반면 신할리 민족주의를 동원하며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협상에 나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다. 정부가 반군과 교섭을 할 때마다 강경파들은 정부가 너무 많이 양보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고 이를 통해 여론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 정부는 ‘전쟁 상황’임을 명분으로 걸핏하면 계엄령,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통해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억압해왔다. 우리나라가 도입하려는 ‘테러방지법’도 스리랑카는 진작에 만들어 놓았다. 물론 우리가 걱정하는대로 이 법은 테러를 막지도 못했고 비판 세력을 체포 구금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타밀 호랑이는 스리랑카 내 24개 행정구역 중 6개 구역, 대부분의 타밀 영역을 확보하고 자체의 사법•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83년 폭동 당시 해외로 이주한 난민들이 이제는 자리를 잡고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재정도 비교적 탄탄해졌다. 그러나 타밀 인들 역시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지쳐갔다. 타밀 호랑이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궁여지책으로 타밀 호랑이는 2001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래도 병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0대 청소년들까지, 때로는 강제로 징병을 하게 되어 문제가 되고있다. 타밀 호랑이 측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청소년들의 자원 입대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조사에 따르면 상당수가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나타났으며, 설령 자원 입대라 하더라도 이는 국제법 위반이다.
 
또한 타밀 호랑이 비판•반대 세력에 대한 협박과 살해도 문제가 되고 있다. ‘프락치’ 혐의자에 대한 고문과 처형이 행해지고 있으며, 군사상 필요를 이유로 마을 주민 30만 명을 강제 소개하기도 했고, 가축이나 농작물을 징발하기도 한다. 게다가 마약 거래 연계 의혹도 받고 있어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는 실정이라 한다.
 
나는 이러한 점을 들어 ‘다 똑 같은 놈들이다!’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거야말로 현실과 유리된 고공 비판으로, 결국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될 뿐이다. 신할리 족이 어떻게 타밀 족을 탄압해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은 채, 타밀 호랑이의 소년병 징집에 대한 비난 성명만을 쏟아내는 인권 단체의 행동은 도저히 올바른 입장이라고 볼 수 없다(이상한 일이다. 이제까지 보아온 인권운동기구의 자료들은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내전의 원인과 현황들을 잘 정리해놓았는데, 이번 경우는 내전의 원인에 관심이 없다. 오래된 일이라 그럴까). 나는 타밀 호랑이의 내부 사정도 모른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게다가 양측이 벌이는 홍보전 역시 치열하기 때문에, 타밀 호랑이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점들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선전인지 구분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위의 의혹들 중 최소한 일부는 사실이라 하면, 타밀의 미래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타밀 호랑이 또한 스스로를 성역으로, 절대 권력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이대로라면 타밀이 독립을 얻더라도, 혹은 자치 정부를 만들더라도, 타밀 인들은 ‘민주화’를 위한 또 한번의 험난한 투쟁의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물론 독립 전쟁에 있어 타밀 호랑이의 공헌은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명분으로 일당독재체제가 성립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억압이 될 뿐이다.
 
그들은 권력욕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까. 타밀 자치정부는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 민주화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역사는 그렇게밖에 발전할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운명이 존재한다면, 이런 의미에서일까.
 
평화로 가는 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내전은 노르웨이가 중재에 나서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2002년 2월부터 일단 휴전이 성립하였고, 5월에는 평화 회담을 열었다. 9월에 이르러 스리랑카 정부가 타밀 호랑이를 불법 단체에서 해제하면서 화해의 동작을 취했고, 마침내 12월에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연방제를 실시하여 타밀 지역에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하지만 자치정부의 권한을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를 두고 아직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타밀 측은 치안, 국방, 조세권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권한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끝내 03년 4월에 이르러 타밀 호랑이는 정부의 비협조를 비난하며 협상 결렬을 선언하였지만, 전투를 재개하지는 않았다. 또다시 무장 투쟁을 벌이기에는 타밀 측도 정치적 부담이 크다.
 
정부측에서도 휴전협정 폐기와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극우파들이 아직 세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향적인 합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태 악화를 막아내고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휴전과 평화를 지지하는 국민의 여론이다. 스리랑카 국민의 85%가 현재의 평화 협정을 지지하고 있다.
 
타밀 호랑이는 2003년 11월부터 다시 협상 재개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노르웨이와 일본 등 51개국과 유엔 등 22개 국제기구가 4년간 45억 달러의 지원금을 책정해두고 평화 협정의 이행 정도에 따라 지급하겠다며 양측을 달래고 있다. 올해 총선에서 극우파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줄어드느냐에 따라 내전 종식의 향방이 가려질 전망이다.
 
해일이 스리랑카를 덮쳤을 때, 위험에 처한 타밀 호랑이 병사들을 구하러 달려온 것은 정부군 병사였다. 자연의 재앙 아래 정부군과 반군은 같은 인간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이후 구호작업을 진행하며 반군은 정부가 타밀 지역에 구호물자를 주지 않는다고, 정부는 반군이 구호 창구 일원화를 고집하며 활동을 지연시킨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구호작업을 함께 협의하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반목을 씻을 수 있는 신뢰가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 기대해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해일은 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평화 정착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정문태,「블랙 타이거 – 꽃다운 목숨을 바치는 소녀들」,『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한겨레신문사, 2004.
『한겨레』
『한겨레 21』
이근수, 「스리랑카 내전 : 사자와 호랑이의 혈투」,『지구촌』2000년 5월호
아시아 평화인권연대 홈페이지(http://www.sopra21.org)
타밀 엘람 홈페이지(http://www.eelam.com)
Wiliam Clarance, “Conflict and Community in Sri Lanka”, History Today, 2002.7.
Amnesty International(http://www.amnesty.org), Sri Lanka: Government’s Response to Widespread “Disappearances” in Jaffna, 1997.11.
Foreign Policy in Focus(http://www.fpif.org), Sri Lanka’s Long War, 2000.10.
Human Rights Watch(http://www.hrw.org), Sri Lanka: Ethnic Violence Escalates(2000.1), Sri Lanka: Human Rights and the Peace Process(2002.7), Canada’s Tamil Must Rethink LTTE Support(2004.2), Sri Lanka: Tamil Tigers Forcibly Recruit Child Soldiers(2004.11)
 
* 물고기님의 지적에 따라 본문중 '타밀 타이거'를 '타밀 호랑이'로 수정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