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4일에 썼던 글입니다.)
몇 해 전 같은 제목의 책이 출판된 일이 있다. 마침 비슷한 주제로 리포트를 쓰고있던 중이라 반가운 마음에 덥석 집어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얻은 것은 큰 실망뿐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총체적인 이유 때문이다.”
아, 허무하여라..그걸 누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식민지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조선, 청, 일본 모두 똑같이 불평등 조약에 의한 개항으로 근대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세 나라의 결과는 크게 달랐다. 조선은 식민지로, 청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일본은 제국이 되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총체적인 이유, 물론 맞는 말이다. 이 제목으로 책을 써도 몇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글에서 모든 측면을 다룰 수는 없고, 여기서는 주로 세계 체제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아래에서 소개할 내용은 학계에서는 적어도 이미 30여년 전부터 논의되어 온 것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께는 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를 권해드린다. 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좀 두껍긴 해도 위 책들을 읽는 것이 훨씬 깊이있는 접근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다른 세계 - 동아시아 국제 질서
오늘날 우리는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국가는 주권을 가지며, 이 주권은 대내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고 대외적으로 타국의 주권과 대등하다. 세계는 이렇게 평등한 주권국가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절차와 관습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기껏해야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 이후에 확립되어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일 뿐이다. 그 전의 유럽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통적 국제 관계의 모습은 이런 관념과는 사뭇 달랐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가란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각국은 ‘천자의 나라’인 중화와 이를 섬기는 제후국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핀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는 책봉과 조공 등의 예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대 관계를 흔히 ‘약소국의 생존 수단’ 내지는 ‘조공 무역을 통한 실리 확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대의 예는 단순한 약소국의 ‘전략’이 아니라 그 당시의 ‘외교 규칙’이었으며, 중국과 교류하고 ‘문명국’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제 관례였다. 사대의 예를 지키지 않는 나라는 ‘예를 모르는 오랑캐 국가’로 취급되어 국제 관계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근대 국제 질서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각국이 공식적으로 서열화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조들이 스스로를 남의 신하로 자처한 것이 수치스러울 수도 있겠고, 평등한 주권을 보유한 세계에 살고있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 각 국가들은 명목상으로 평등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은 약소국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주외교’를 향한 열망이 나타나지 않는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제후국은 명목상으로 종속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정책에 있어서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다. 구한 말, 서양 열강들이 조선의 지위에 관해 청에 끊임없이 문의하였을 때도 청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나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자주적 속국’이라니 이게 무슨 모순인가? 이는 당시의 서양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관점으로 동아시아 체제를 들여다보니 이해가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명목상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세계와, 명목상 불평등하지만 실제로는 평등한 세계.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게 가능할까?
조공은 수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과거 동아시아에서 조공은 단순한 전략이기 이전에 외교 관례이며 규칙이었다. 국가간의 교류를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차라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외국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듯이, 당시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전혀 수치도 치욕도 허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공을 통해 그 나라가 국제 사회의 일원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사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국제 질서는 유교 철학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때 조공을 받는 ‘중화’는 단순히 힘만 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국들을 교화하는 선진 문화와 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힘으로 사대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고려의 관계나 청-조선 관계 초기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 관계는 조공국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조공하는 측에서도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물론 국내정치적 고려도 무시할 수 없다).
‘중화’가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조공은 강요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동남아시아 일부 정권의 경우, 중국측에서는 귀찮으니 오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스스로 때를 맞추어 험한 길을 마다않고 조공을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안보상의 위협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는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지위가 문명 사회의 일원임을 나타내주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진왜란 전후 처리에서도 이것이 잘 나타난다. 다들 잘 알듯이 한반도 거의 전역을 점령했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과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한반도 남부로 물러가 강화 협상을 시작한다. 여기서 일본의 요구 조건이 재밌다. 명을 정벌하겠다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강화 조건이라는 것이,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겠다는 것이다.
오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국의 왕이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청하는 것은 항복문서에서나 써야 할 조건이 아닐까? 그런데 일본은 이를 먼저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 군대가 일본 본토를 위협하거나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군이 아직도 한반도에 일부 남아있는 상태인데 말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선 정부의 반응이다. ‘명을 정벌하겠다’며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명의 신하가 되겠다며 조공을 한다면 조선으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강화 조건에 단호히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역시 당대의 관점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거듭 말하듯이 조공은 수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국’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천자의 나라’인 ‘명’을 ‘정벌하겠다’며 군사를 일으킨 ‘무도한 오랑캐’ 일본에게 천자를 섬기는 조공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를 포상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조선과 일본은 공히 명의 제후국으로 대등한 지위가 되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이에 반대했던 것이며, 명은 타협안으로 책봉은 하되 조공은 접수하지 않는 방안을 내놓았으나 일본이 거부, 결국 전쟁은 무력으로 끝나게 된다. 조공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환의 비용 : 나중된 자가 처음되는 세계
결국 일본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소외되었다. 당시의 세계를 그려보자면 청이 문명의 중심부에 있고 조선을 준중심부, 일본을 주변부에 놓을 수 있다.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일본은 UN이나 WTO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소외된 격이라 할 수 있다(물론 중국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오늘날 이를 보고 ‘일본은 오랑캐였다’라고 주장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와 세계를 발전시켰다).
주변부로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배제된 일본이지만, 시대가 바뀌어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이 시작되는 ‘서세동점’의 시기가 되자 일본의 이 약점은 강점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기존 체제의 변두리에 위치했던 만큼, 서양 근대 체제라는 새로운 시대로 전환한다고 하여도 잃을 것이 없었다. 지켜야 할 기득권이 없는 것이다. 일본은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서둘러서 결국 서양 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청은 기존 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러나 왕년의 중심국가였던만큼 열강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워낙 큰 나라인 까닭에 한 나라가 독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상 반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의 정권은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은? ‘소중화’를 자처할만큼 조선은 기존 질서에 긴밀하게 포섭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국가였던만큼 이 질서를 수호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버려야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구 질서에 길들여진 당시 지도층들은 새로운 변화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유교 질서를 내면화한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국가는 천자의 국가와 대등한 권한을 보유한다는 관념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오랑캐’의 생각이었고, 그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서양 열강도, 그들을 모방하려 애쓰는 일본도 모두 문명의 교화를 받지 못한 오랑캐들이었다. ‘왜양일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은, 자기가 쓴 것도 아니고 청나라 공사가 써준 책을(그것도 청, 미국, 일본과 수교해야 한다는 내용밖에 별 책도 아니었다) ‘가지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소위 신사유람단)은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동래 암행어사’로 신분을 위장하여 극비리에 출국해야 했고, 그 경비도 고종이 사비를 털어 감당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에서 이미 1869년에 발표한 『서양사정』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1895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미 26년의 시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국가’의 지도층으로서 당시 조선 집권층은 시대의 전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의 압력도 더욱 심해졌다. 국세가 나날이 기울어가던 청은 그 지위를 조금이나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제후국들을 더욱 철저히 장악하려 했다. 즉, 전통적 의미의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속국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청의 세력이 기울어 갈수록 조선에 대한 간섭은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제국을 향해 발돋움하던 일본은 그 먹잇감으로 조선을 선택했으며, 서양 열강은 작은 나라 조선에 대해 무관심했으므로 견제 세력도 없었다.
결국 기존 국제질서에 완벽히 적응했던 조선은 내부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향한 전환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외부적으로 구 세력의 속박과 신 세력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질곡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식민화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면
이제는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흔히 현재를 구한말의 상황에 비유한다. 그것이 적절한 비유인가도 논란의 여지가 있고, 현재의 어떤 점이 구한말과 유사한지를 두고도 사람에 따라 여러 입장이 있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역적으로는 냉전의 시대,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리고 기득권층 - 구 집권층들은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여 정권 유지에 성공했다. 아니, 꼭 기득권층뿐만이 아니더라도, 남한은 반공주의가 매우 강력한 국가였으며 미국의 그늘 아래 경제 성장과 안보를 확보한 대표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전체가 이러한 시대에 잘 적응하여 생존한 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다.
분단이 유지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미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의 세기 이후가 어떤 시대가 될지를 예측하는 것도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세계 질서는 없다는 것이다. 옛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구축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잘 포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까? 옛 질서에서 성공하였다고, 전환의 비용이 너무 크다고 해서 새 시대를 외면하다가는 여태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우리를 향해 역사가 주는 교훈일 것이다.
몇 해 전 같은 제목의 책이 출판된 일이 있다. 마침 비슷한 주제로 리포트를 쓰고있던 중이라 반가운 마음에 덥석 집어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얻은 것은 큰 실망뿐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총체적인 이유 때문이다.”
아, 허무하여라..그걸 누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식민지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몽땅 내 책임이라고?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한겨레(www.hani.co.kr)에서 재인용)
조선, 청, 일본 모두 똑같이 불평등 조약에 의한 개항으로 근대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세 나라의 결과는 크게 달랐다. 조선은 식민지로, 청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일본은 제국이 되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총체적인 이유, 물론 맞는 말이다. 이 제목으로 책을 써도 몇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짧은 글에서 모든 측면을 다룰 수는 없고, 여기서는 주로 세계 체제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아래에서 소개할 내용은 학계에서는 적어도 이미 30여년 전부터 논의되어 온 것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께는 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를 권해드린다. 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좀 두껍긴 해도 위 책들을 읽는 것이 훨씬 깊이있는 접근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다른 세계 - 동아시아 국제 질서
오늘날 우리는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국가는 주권을 가지며, 이 주권은 대내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갖고 대외적으로 타국의 주권과 대등하다. 세계는 이렇게 평등한 주권국가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외교 절차와 관습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기껏해야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 이후에 확립되어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일 뿐이다. 그 전의 유럽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통적 국제 관계의 모습은 이런 관념과는 사뭇 달랐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가란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각국은 ‘천자의 나라’인 중화와 이를 섬기는 제후국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보살핀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는 책봉과 조공 등의 예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대 관계를 흔히 ‘약소국의 생존 수단’ 내지는 ‘조공 무역을 통한 실리 확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대의 예는 단순한 약소국의 ‘전략’이 아니라 그 당시의 ‘외교 규칙’이었으며, 중국과 교류하고 ‘문명국’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국제 관례였다. 사대의 예를 지키지 않는 나라는 ‘예를 모르는 오랑캐 국가’로 취급되어 국제 관계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근대 국제 질서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각국이 공식적으로 서열화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조들이 스스로를 남의 신하로 자처한 것이 수치스러울 수도 있겠고, 평등한 주권을 보유한 세계에 살고있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 각 국가들은 명목상으로 평등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은 약소국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자주외교’를 향한 열망이 나타나지 않는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제후국은 명목상으로 종속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정책에 있어서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다. 구한 말, 서양 열강들이 조선의 지위에 관해 청에 끊임없이 문의하였을 때도 청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나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자주적 속국’이라니 이게 무슨 모순인가? 이는 당시의 서양 열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관점으로 동아시아 체제를 들여다보니 이해가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명목상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세계와, 명목상 불평등하지만 실제로는 평등한 세계.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게 가능할까?
조공은 수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과거 동아시아에서 조공은 단순한 전략이기 이전에 외교 관례이며 규칙이었다. 국가간의 교류를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차라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외국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듯이, 당시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전혀 수치도 치욕도 허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조공을 통해 그 나라가 국제 사회의 일원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사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국제 질서는 유교 철학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때 조공을 받는 ‘중화’는 단순히 힘만 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국들을 교화하는 선진 문화와 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힘으로 사대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고려의 관계나 청-조선 관계 초기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 관계는 조공국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조공하는 측에서도 수치로 여겼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물론 국내정치적 고려도 무시할 수 없다).
‘중화’가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조공은 강요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동남아시아 일부 정권의 경우, 중국측에서는 귀찮으니 오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스스로 때를 맞추어 험한 길을 마다않고 조공을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안보상의 위협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는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지위가 문명 사회의 일원임을 나타내주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진왜란 전후 처리에서도 이것이 잘 나타난다. 다들 잘 알듯이 한반도 거의 전역을 점령했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과 해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한반도 남부로 물러가 강화 협상을 시작한다. 여기서 일본의 요구 조건이 재밌다. 명을 정벌하겠다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강화 조건이라는 것이,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겠다는 것이다.
오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국의 왕이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청하는 것은 항복문서에서나 써야 할 조건이 아닐까? 그런데 일본은 이를 먼저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 군대가 일본 본토를 위협하거나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군이 아직도 한반도에 일부 남아있는 상태인데 말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선 정부의 반응이다. ‘명을 정벌하겠다’며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명의 신하가 되겠다며 조공을 한다면 조선으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강화 조건에 단호히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역시 당대의 관점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거듭 말하듯이 조공은 수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국’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천자의 나라’인 ‘명’을 ‘정벌하겠다’며 군사를 일으킨 ‘무도한 오랑캐’ 일본에게 천자를 섬기는 조공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를 포상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그렇게 되면 조선과 일본은 공히 명의 제후국으로 대등한 지위가 되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이에 반대했던 것이며, 명은 타협안으로 책봉은 하되 조공은 접수하지 않는 방안을 내놓았으나 일본이 거부, 결국 전쟁은 무력으로 끝나게 된다. 조공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환의 비용 : 나중된 자가 처음되는 세계
결국 일본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소외되었다. 당시의 세계를 그려보자면 청이 문명의 중심부에 있고 조선을 준중심부, 일본을 주변부에 놓을 수 있다.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일본은 UN이나 WTO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소외된 격이라 할 수 있다(물론 중국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오늘날 이를 보고 ‘일본은 오랑캐였다’라고 주장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일본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와 세계를 발전시켰다).
주변부로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배제된 일본이지만, 시대가 바뀌어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이 시작되는 ‘서세동점’의 시기가 되자 일본의 이 약점은 강점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기존 체제의 변두리에 위치했던 만큼, 서양 근대 체제라는 새로운 시대로 전환한다고 하여도 잃을 것이 없었다. 지켜야 할 기득권이 없는 것이다. 일본은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서둘러서 결국 서양 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청은 기존 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러나 왕년의 중심국가였던만큼 열강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워낙 큰 나라인 까닭에 한 나라가 독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상 반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의 정권은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은? ‘소중화’를 자처할만큼 조선은 기존 질서에 긴밀하게 포섭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국가였던만큼 이 질서를 수호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버려야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구 질서에 길들여진 당시 지도층들은 새로운 변화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유교 질서를 내면화한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국가는 천자의 국가와 대등한 권한을 보유한다는 관념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오랑캐’의 생각이었고, 그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서양 열강도, 그들을 모방하려 애쓰는 일본도 모두 문명의 교화를 받지 못한 오랑캐들이었다. ‘왜양일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은, 자기가 쓴 것도 아니고 청나라 공사가 써준 책을(그것도 청, 미국, 일본과 수교해야 한다는 내용밖에 별 책도 아니었다) ‘가지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소위 신사유람단)은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동래 암행어사’로 신분을 위장하여 극비리에 출국해야 했고, 그 경비도 고종이 사비를 털어 감당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에서 이미 1869년에 발표한 『서양사정』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1895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미 26년의 시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국가’의 지도층으로서 당시 조선 집권층은 시대의 전환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의 압력도 더욱 심해졌다. 국세가 나날이 기울어가던 청은 그 지위를 조금이나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제후국들을 더욱 철저히 장악하려 했다. 즉, 전통적 의미의 속국을 ‘근대적 의미’의 속국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청의 세력이 기울어 갈수록 조선에 대한 간섭은 더욱 늘어났다. 게다가 제국을 향해 발돋움하던 일본은 그 먹잇감으로 조선을 선택했으며, 서양 열강은 작은 나라 조선에 대해 무관심했으므로 견제 세력도 없었다.
결국 기존 국제질서에 완벽히 적응했던 조선은 내부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향한 전환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외부적으로 구 세력의 속박과 신 세력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질곡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식민화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역사가 반복된다면
이제는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흔히 현재를 구한말의 상황에 비유한다. 그것이 적절한 비유인가도 논란의 여지가 있고, 현재의 어떤 점이 구한말과 유사한지를 두고도 사람에 따라 여러 입장이 있겠지만, 그와 상관없이 ‘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역적으로는 냉전의 시대,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리고 기득권층 - 구 집권층들은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여 정권 유지에 성공했다. 아니, 꼭 기득권층뿐만이 아니더라도, 남한은 반공주의가 매우 강력한 국가였으며 미국의 그늘 아래 경제 성장과 안보를 확보한 대표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전체가 이러한 시대에 잘 적응하여 생존한 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다.
분단이 유지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미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의 세기 이후가 어떤 시대가 될지를 예측하는 것도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세계 질서는 없다는 것이다. 옛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구축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잘 포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까? 옛 질서에서 성공하였다고, 전환의 비용이 너무 크다고 해서 새 시대를 외면하다가는 여태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우리를 향해 역사가 주는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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