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야기2011. 8. 30. 21:05
(2005년 9월 15일에 썼던 글입니다.)



(저는 외교 실무경험도 없고 관련 전문가도 아니니, 글의 정확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아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쓰는 글입니다만, 내용중 오류나 보충할 것들이 있으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무자가 쓴 책으로는 최병구, <외교, 외교관>을 참고하실 수 있지만, 그 책을 읽고 쓰는 글은 아닙니다.)


정치인들의 발언이 대개 그렇지만, 외교와 관계된 발언들은 상당히 모호하고 우회적인 표현을 하는 수가 많다. 장관이 발표하는 각종 연설문이나 기자회견에서의 답변 등도, 매우 중요한 행사인 것처럼 보임에도 정작 내용은 그냥 좋은 말들로 가득 찬, 따라서 하나 마나한 소리로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그게 진짜 하나 마나한 소리라면 귀중한 시간을 써가며 말하지는 않을 터. 완곡어법의 진수라 할 외교적 수사를 읽어내 보자.


예 1. "양국은 이번 회담에서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솔직하게'. 보통 솔직함은 긍정적인 어감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일상적 어법에 따라 이 문장을 이해한다면, 양국은 뒤에 감춘 '검은 음모' 따위 없이,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회담에 임했다는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회담이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이 문장은 회담이 결렬되었다는 뜻이다. 상대국에 대한 고려 없이, 서로가 자기 할 말만 쏟아놓고 나왔다는 얘기다. 일상에서도 솔직함은 때로 무례함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외교적으로 '솔직한' 대화는, 서로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화를 나누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의 예를 일상적인 회화로 번역해보면 이런 문장이 된다.

"우리는 이번 회담에서 대판 싸웠다."

위의 말은 2002년에 북한을 다녀온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했던 말이다.


예 2. "(북한은) 조건이 성숙된다면 6자 회담에 참여하겠다."

지난 3차 6자 회담이 시작되기 전, 한창 북한이 회담 참여를 거부하며 각국의 애를 태우고 있던 와중에 발표된 성명이다. 계속해서 북한이 회담에 응하지 않으면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물론, 미국의 강경한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는 불안이 만연했던 때라, 회담 참여 가능성을 비친 이 성명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외교 성명에서는 항상 조건문에 주의해야 한다. 위 문장도 역시 조건문, 회담 참여를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다. '조건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무엇이 '성숙한 조건'인가? 그거야 당연히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포기. 그러나 당시 미국에 이렇다 할 정책 변화는 없던 상태였다. 결국 위 성명은 실제로는 이런 의미가 된다.

"조건이 좋지 않으므로 6자 회담에 참여하지 않겠다."

결국 북한의 입장은 별로 변한 게 없는 셈이다.


예 3. "이번 회담을 통해 양국간 현안들에 관한 상당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번 포인트는 '상당한' 되겠다. 역시 얼핏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김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상당한'이라는 형용사를 썼을까 의문이 든다. 그냥 '합의를 이루었다'고만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다.

'상당한' 합의란, 대체로 의견 일치를 보았지만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즉, 아직까지 양국간에 이견이 남아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담이 끝날 때까지 합의하지 못한 사항은 대개 양측에 모두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런 말로 바꿔볼 수 있다.

"이번 회담에서 아직까지 합의하지 못한 현안이 있다."

원문은 '합의'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속사정은 그리 밝지만은 못한 것이다.


예 4. (재외 공관의 공금 유용에 관한 질문에 대해)"감사원으로부터 감사 결과를 통보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국제 문제는 아니지만, 기자의 질문에 대한 외교부 담당자의 답변이다. 기자는 감사원이 재외 공관들의 공금 유용을 적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외교부에 이를 확인하려 하고 있다.

대답을 요약하면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냥 모른다고 안하고 굳이 감사원을 끌어들이고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자기들 의견은 전혀 들어가있지 않다. 그래서 외교부는 그런 사실을 안다는 건가, 모른다는 건가? 알면서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고, 진짜로 모른다고 하면 직무유기가 된다. 이런 딜레마를 외교부는 '감사원이 아직 통보하지 않았다'는 말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공금 유용이) 들통나서 아쉽지만, 아직 발표 안됐으니 우리가 먼저 시인하지는 않겠다."

역시 외교부 아니랄까봐, 말 솜씨 하나는 정말 능구렁이다.


외교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들이 일상적 용법과 다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어 하나 하나에 집착하여 억지스러운 해석을 시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단어 하나의 해석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좋은 예가 한일기본조약 2조, "~대한제국과 일본국 사이의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이미'의 해석에 따라 식민 지배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너무 의심에 사로잡혀 문안 작성자는 의도하지도 않은 해석들을 내어놓고 비판한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상대국에 대한 예의라는 측면, 그리고 외교문서의 경우 자구 하나 하나가 앞으로 국가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외교관들이 가능한 한 추상적이고 다의적인 단어를 선택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일반인으로서 이러한 어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가끔씩 '저 뜬구름 잡는 듯한 말은 무얼 의도하고 하는 말일까' 하고 추측해 보는 일도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다.
Posted by 술이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