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19일에 썼던 글입니다.)
한미관계의 역사는 짝사랑의 역사였다. 미국 공사가 조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일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기 전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은 미국이 정의의 나라, 약소국을 보호하는 도덕적인 나라라고 생각해왔다. 정작 미국쪽에서는 조선이 어디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로의 인식이 이렇게도 다른 것은 비극이었다.
'정의로운 나라' 미국에 대한 호감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남한의 집권층들에게 미국은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마련해준 은인이었고, 전쟁을 겪은 국민들에게 미국은 '빨갱이'들을 물리쳐준 영웅이었다. 정권차원의 홍보와 교육도 병행되었다. 미국은 서양, 선진국, 아니 '외국' 일반을 대표했다. '외국=미국'이었고, '외국인=미국인'이었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번영의 수호자였고, 대한민국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미국의 원조와 보호 없이는 '북괴'의 '적화야욕'과 그들을 부추기는 중국, 소련의 음모로부터 남한은 한 시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이 베풀어 준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미국 내 보수파들이나 국내 극우세력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본격적으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항쟁 이후인 것으로 알고있다. 광주항쟁 자체가 반미 운동은 아니었음에도, 미국이 진압군 투입을 '승인'했다는 주장,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자' 미국이 학살자 전두환 정권을 승인한 사실 등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제 미국은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나라, 세계를 자기 이익에 따라 통제하는 제국주의 국가, 대리 정권을 통해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식민 모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담론들과 어우러져 '반미 자주'라는 구호가 운동 진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친미와 반미 양 진영은 서로를 친북 빨갱이로, 사대주의자로 비난하며 상대방의 척결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양 편의 인식은 실제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분단, 전쟁, 광주 항쟁 등 한반도의 수많은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할 때, 남한의 60년 역사를 외세의 강점에 의한 억압의 역사로 규정할 때, 그래서 진정한 진보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몰아낼 때에만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전능자'로서의 미국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있으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있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미파'와 '반미파'는 겉으로는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사실상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의 주역은 미국이다.' 미국의 원조와 참전, 보호가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나, 미국의 간섭과 억압때문에 한반도의 진보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나, 주체로서의 한국, 한국인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한국은 다만 원조와 지배의 대상으로만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외관상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입장은, 사실은 서로를 거울에 비춰놓은 형태인 것이다. '반미 자주'라는 주장은 그래서, 그 강렬한 민족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이 아니다. 주체로서의 민족이 없는 민족주의라니!
근대 세계에서 한 국가의 정책을 은혜나 도덕적 원리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 고려한 결과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친미론'은 폐기해 마땅한 것임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반미 운동이 일정한 의의가 있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들 치고 '의리와 정의의 미국'을 믿는 사람은 없다. 반미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뿐만 아니라 '반미'라는 구호는 동질적이고 단일한 미국을 가정하고, 그 국가를 총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미국은 과연 하나인가? 미국 내에서도 자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얼마나 다양한 소리가 있는가. 나는 이전에 여러 제3세계 국가들의 내전을 소개하면서 이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은 사실은 미국의 정책 연구자들이 제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반미 미국인'들인가?
현재 미국의 행태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필요한 것은 '반미'라는 총체적인 구호가 아니라, 각 사안에 따라 이뤄지는, 미국을 포함한 각국내 비판적 세력과의 연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을 반대할 때 대안적인 세계 또한 구상할 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도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맥아더 동상 철거 논쟁을 보면서,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의로운 나라' 미국에 대한 호감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남한의 집권층들에게 미국은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마련해준 은인이었고, 전쟁을 겪은 국민들에게 미국은 '빨갱이'들을 물리쳐준 영웅이었다. 정권차원의 홍보와 교육도 병행되었다. 미국은 서양, 선진국, 아니 '외국' 일반을 대표했다. '외국=미국'이었고, '외국인=미국인'이었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번영의 수호자였고, 대한민국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미국의 원조와 보호 없이는 '북괴'의 '적화야욕'과 그들을 부추기는 중국, 소련의 음모로부터 남한은 한 시도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이 베풀어 준 은혜를 알아야 한다'는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미국 내 보수파들이나 국내 극우세력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본격적으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항쟁 이후인 것으로 알고있다. 광주항쟁 자체가 반미 운동은 아니었음에도, 미국이 진압군 투입을 '승인'했다는 주장,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자' 미국이 학살자 전두환 정권을 승인한 사실 등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제 미국은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나라, 세계를 자기 이익에 따라 통제하는 제국주의 국가, 대리 정권을 통해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식민 모국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담론들과 어우러져 '반미 자주'라는 구호가 운동 진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친미와 반미 양 진영은 서로를 친북 빨갱이로, 사대주의자로 비난하며 상대방의 척결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양 편의 인식은 실제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분단, 전쟁, 광주 항쟁 등 한반도의 수많은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할 때, 남한의 60년 역사를 외세의 강점에 의한 억압의 역사로 규정할 때, 그래서 진정한 진보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몰아낼 때에만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전능자'로서의 미국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있으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있는 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므로,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미파'와 '반미파'는 겉으로는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사실상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의 주역은 미국이다.' 미국의 원조와 참전, 보호가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나, 미국의 간섭과 억압때문에 한반도의 진보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나, 주체로서의 한국, 한국인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한국은 다만 원조와 지배의 대상으로만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외관상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입장은, 사실은 서로를 거울에 비춰놓은 형태인 것이다. '반미 자주'라는 주장은 그래서, 그 강렬한 민족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이 아니다. 주체로서의 민족이 없는 민족주의라니!
근대 세계에서 한 국가의 정책을 은혜나 도덕적 원리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 고려한 결과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친미론'은 폐기해 마땅한 것임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반미 운동이 일정한 의의가 있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들 치고 '의리와 정의의 미국'을 믿는 사람은 없다. 반미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뿐만 아니라 '반미'라는 구호는 동질적이고 단일한 미국을 가정하고, 그 국가를 총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미국은 과연 하나인가? 미국 내에서도 자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얼마나 다양한 소리가 있는가. 나는 이전에 여러 제3세계 국가들의 내전을 소개하면서 이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은 사실은 미국의 정책 연구자들이 제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이들은 '반미 미국인'들인가?
현재 미국의 행태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필요한 것은 '반미'라는 총체적인 구호가 아니라, 각 사안에 따라 이뤄지는, 미국을 포함한 각국내 비판적 세력과의 연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을 반대할 때 대안적인 세계 또한 구상할 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도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맥아더 동상 철거 논쟁을 보면서,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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